『 산동성 기행-사람 값 』
식당을 주가(酒家) 주점(酒店), 호텔을 빈사(賓舍) 대하(大厦)라 하여 한자만 생각하다가는 식당을 술집으로 잘못 알고 찾는 경우가 있을 것 같았다. 빈사보다는 조금 저급, 아마 우리의 여관 급은 병관(兵館)으로 불리고 고급의 호텔은 대주점(大酒店)으로 간판을 거창하게 달아놓았다.
우리가 밥을 먹으러 가는 식당이나 호텔은 도시에서 제일 크고 번화한 곳에 위치한 고급 식당들이었다. 식당의 입구부터 두 명의 아가씨가 양손을 모으고 머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이것은 우리가 가는 식당마다 꼭 같았다. 그리고 우리가 식사하는 중에 옆에서 서너 명의 아가씨들이 차 주전자를 들고 잔을 채워 주었다.
평소에 없던 대접을 받으니 습관이 되지 않아서 영 마음에 부담이 되었다. 몇 번이나 어색하여 고개를 숙여 고맙다고 인사를 하였다. 아마 우리 나라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적어도 한 사람에 팔 구십 만원의 인건비를 계산하면 몇 달되지도 않아 그 식당은 문을 닫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중국에서 이런 것은 보통이었다. 인건비가 싸고 특히 '흑인(黑人)'이라 불리는 여자들은 생존에 필요한 정도의 봉급으로도 일자리를 얻으려 애를 쓴다고 했다.
중국은 심각한 인구문제로 한족은 한 명의 자녀를 소수민족은 두 명의 자녀를 가질 수 있도록 산아제한을 법으로 정했기 때문에 아들을 선호하는 중국 사람들이 첫딸을 낳으면 호적에 올리지 않고 그냥 키우거나 버린다고 했다. 그 여자들을 흑인이라고 하는데 대략 우리 나라 전체인구 즉 7000만 명 정도로 주민증도 없고 인구통계에도 빠져 앞으로 사회문제로 대두될 것이라 했다.
이들은 사람 대접뿐만 아니라 사람값도 형편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저 입고 먹여주기만 하면 시키는 일을 한다는 것이다. (실제 열 두서너 살 먹은 중학생 정도의 계집아이가 하루 열두 시간씩 발 마사지를 한다고 했다.)
똑같은 사람으로 태어나 무엇 때문에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인가?
나는 오래 전부터 평등에 대하여 고민하여 왔다.
곡부의 공자 묘 앞에서 만난 난쟁이는 우리들에게 구걸을 하였는데 어느 선생님이 쓰다 남은 동전 몇 전을 주었더니 우리들 앞에서 물구나무서기를 하고 공중돌기를 하면서 온갖 재주를 피우다(?) 손을 흔들고 고맙다고 몇 번이나 절을 하고 떠났다. 떠나가는 난쟁이 그 때묻은 윗도리 옷깃에서 인간적인 비애를 보았다.
너무 많은 양의 음식이 차려지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절반도 먹지 못하고 남겼다.
중국에서는 남기는 것이 예의라고 했다.
그리고 식당 문을 나오며 자신의 배가 부름으로 다른 많은 사람이 그 음식을 구하기 위해 인권마저 팽개친다는 사실을 잊고 여행을 하였다.
지금도 아장아장 걸어가던 그 난쟁이의 올 겨울이 걱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