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 감나무 식당 』---(4)

일흔너머 2008. 4. 6. 22:51

 

 그날도 낚시꾼들이 마지막 납회(納會)를 한다며 단체로 몰리는 바람에 얼마나 바빴는지 모른다. 눈코 뜰 새 없이 손님들 시중을 잠시 밖으로 나왔다. 감나무 아래에 나온 박씨는 담배 한대를 빼물었다. 전주댁이 오기 전에는 순득 엄마가 누워있는 비탈을 자주 내려다보곤 했는데 이제는 습관처럼 되었다. 그래서 전주댁이 눈치채지 못하게 감나무를 살피는 척하며 비탈을 내려다보곤 했었다. 겨울 감나무에는 까치 밥이라며 남겨놓은 두어 개 홍씨가 가지 끝에서 말라가고 있었다.


'귀신같이 안다는 데…….'
아람이와의 그날 일만 생각하면 얼마나 후회되는지 모른다. 전주댁 보다도 저 아래 누워있는 순득 엄마가 더 욕할 것 같았다. 무덤 속에서 벌떡 일어나 비틀비틀 걸어나올 것만 같았다. 물론 살아 생전에도 대놓고 달려드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발악을 하며 멱살을 잡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박씨 자신이 짐승처럼 추하게 느껴지기는 여태 살아오면서 처음이었다.

 
그 때 박씨는 등뒤로 인기척을 느꼈다. 그리고 두 무릎 사이에 하얀 종이뭉치가 떨어졌다. 박씨가 돌아보자 사람은 벌써 식당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아람이였다. 박씨는 누가 볼까 얼른 땅에 떨어진 종이를 주어 호주머니에 넣었다.
'뭔가? 어디서 봐야 하나? 어떻게 해야 하나?…….'
박씨의 머리는 순식간에 너무 많은 생각으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가슴이 뛰면서 숨이 막혔다. 아까 까지만 해도 어떻게 끝을 내야한다고 마음을 다잡고 궁리했는데 꼬깃꼬깃 구겨진 종이 조각하나 받고 이렇게 흔들리는 것이다. 양심이 나무랄 때는 전주댁도 순득 엄마도 박씨 옆에 있었지만 자신도 주체할 수 없는 늘그막 욕정에는 아람이의 그 하얀 가슴과 솜털이 덮인 귓불만 눈앞에서 왔다갔다하는 것이었다.

 

평소에도 아람이네 밭뙈기는 후미진 곳이라 인적이 드물었다. 그런데다 날이 어둑어둑해 오는 저녁이라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박씨는 그저 아람이네가 준 그 종이조각이 당기는 마력에 이끌려 마치 독한 술에 취한 듯 비틀거렸다. 그리고 멀찍이 아람이가 흔드는 손만 보고있었다. 그러자 아람이는 무슨 도둑질이라도 하는 양 주위를 힐끗힐끗 둘러보면서 박씨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잽싸게 박씨 팔을 잡아채 덤불 속에다 밀어 넣었다. 그리곤 아이들이 무슨 잘못을 저지르며 무서워 피하기라도 하듯 납작 엎드렸다. 그러고 보니 아람이와 박씨는 그저 얼굴 하나 사이로 바싹 붙어 있었고 냅다 뛰어온 바람에 아람이는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향긋한 여인네의 살 냄새가 박씨의 코를 찌르자 박씨는 정신이 아득했다. 아무도 없는 조용한 들판, 지나는 바람에 키 큰 억새는 박씨의 그 마음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박씨는 엉거주춤하게 엎드려 아람이를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
"뭘 보소?"
"?"
우리 지난 일은 술이 저지른 일이니 없었던 걸로 하자. 그리고 조용히 덮자. 누가 알면 큰 일이 아닌가. 아무도 모를 때 없었던 걸로 하고 제자리로 돌아……. 이런 온갖 생각들이 머리 속에서만 맴돌 뿐 아람이가 당기면 당기는 대로 몸은 못이긴 채 빨려들고 있었다. 짧은 가을 해 떨어지고 어둑어둑 땅거미 찾아오는 억새 밭에는 계절을 아쉬워하는 풀벌레 소리가 여름날 소나기 같았다. 하지만 그 순간 아람이의 숨소리 외에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찬 겨울 바람이 눈을 몰아 온 세상이 하얗게 덮일 때까지 두 사람은 아무 것도 그 무엇도 알려고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