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골산(皆骨山)을 무사히 다녀왔습니다』
국민학교 다닐 때 같은 반이었고 나와 함께 짝이 되어 학예회에서 요즘 말로 개그, 그때는 만담이란 것을 한 친구가 있다. 무척 활달한 성격에 얼굴이 밝고 키가 커서 인기가 있었다. 물론 나중에 성년이 되어서는 기술(?)도 갖추어 나이트 클럽에서 제비까지는 안 되어도 여자들의 인기를 독차지한 것으로 안다.
그 친구가 구설수에 올라 '나쁜 녀석'이니 '몹쓸 녀석'이니 하며 선배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은 적이 있다. 조그만 시골구석에서 윗사람들의 핀잔은 곧 그 사회에서의 몰락을 의미한다. 안타까운 마음에 이리저리 소문을 하여 알아본 이유인 즉 별 게 아니었다. 나이트 클럽에도 가고 술집에도 가고 하다보니 술자리에서 같이 앉은 아가씨를 취중에 지분거린 것이 말썽이었다. 지나던 선배가 보고,
"저 녀석 술 먹으러 왔으면 술이나 곱게 먹고 갈 것이지 아가씨와 무슨 짓거리야…… 일은 않고."
이 정도로 평이 나자 다음 선배가 또 한 마디 하고,
"요새 젊은 녀석들 다 그래."
찧고 까불고 해서 남의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걸 저리 또 저걸 이리 옮기고. 결국 그 친구 완전히 낙인찍힌 것이다.
어느 날 우연히 그 친구를 만났다. 그리고 대놓고 단도직입적으로 묻지는 못하고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고 하니까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쉽고도 시원하게 내놓는 것이었다.
"그것?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라. 내가 나쁘다면 나쁘고 또 선배들이 나쁘다면 나쁜 거야. 후배 일 가지고 이러쿵저러쿵하는 것도 좋은 것은 아니잖아. 내가 술집에 가서 술 좀 먹었어. 아가씨들 끌어안고 장난도 쳤어. 모두 사실이야. 그런데 그게 뭐가 나쁜 거야? 내가 미성년자라서 법을 어긴 것도 아니고 남의 유부녀 건드린 것도 아니고 내 돈 내고 술 먹고 접대하는 아가씨 데리고 장난 좀 쳤기로서니 뭐가 나쁘다는 거야? 넥타이 매고 가부좌 틀고 도(道)닦듯 앉아 술 먹을 것 같으면 술집에는 왜 가? 슈퍼에 가서 한 병에 칠 백 오십 원 주고 사 마시면 되는 것을 왜 술집에 가서 한 병에 삼천 원 주고 마시는 데?"
오늘 갑자기 그 친구가 하던 하소연이 생각나는 것은 주위의 동료 선생님들이 금강산 가자고 하도 꼬드기는 바람에 멋모르고 따라갔다가 당했다는 억울한 기분이 눈 덮인 개골산의 경치보다 더 강렬했기 때문이다.
여행이란 일상을 벗어나 마음을 풀어놓고 경치뿐만 아니라 그저 자유롭게 지내면서 이웃을 보고 자신을 살피며 삶을 돌아보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이건 나의 모든 자유를 한꺼번에 앗아가 버리는 그런 기간이 되었다. 다시 군대를 입대해도 이렇지는 않았으리라. 내 돈 내고 이런 마음고생을 했으니 영 개운치가 않다.
안내를 맡은 우리의 가이드는 '이것이 좋을 것이다.' '이것이 자랑거리다.'하며 우리들의 관광을 돕기는커녕 그저 '이것은 하지 말라.' '이리로 사진을 찍어서는 안 된다.' 하며 규제 일변도로 주의만 주는 것이었다. 아무리 좋은 술집이면 뭐하나 규칙을 지키고 조용히 술만 목구멍에 넘길 일이면 슈퍼마켓 앞에 차려 논 평상에 앉아서 시원한 맥주를 양만큼 헐값에 마실 일이지.
속초 항을 출발하여 장전 항에 도착하자마자 시작된 규제는 여행기간 내내 '무사히 여행을 마치고 과연 온전하게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하는 걱정을 안고 지내도록 만들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금강산 천하제일경이 아니라도, 마음 편히 가족들과 노란 유자 달려있고 동백꽃 피는 따뜻한 남쪽 해변을 여행하는 편이 나을 뻔했다고 내내 후회했다.
모르긴 해도 아마 이것이 금강산 관광을 번창하게 하지 못하는 이유는 아닐까?
온정각 앞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