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쥐께이세이 』
"그때가 좋았다."
는 것은 아무리 어렵고 험한 일일지라도 지나간 일들은 추억이란 이름으로 다가와 그 시절 함께 했던 모든 아픔은 이미 사라지고 해냈다는 뿌듯한 보람만 남았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경비업체가 학교를 지키기 전에는 선생님들이 순번을 정해 일직과 숙직을 했는데 여간 귀찮고 성가신 일이 아니었다. 그 이튿날은 쉬는 것도 아니고 잠을 설쳐 부스스한 얼굴로 수업을 해야했기 때문에 고달프기 말이 아니었다. 거기다가 숙직실이란 것이 열악하기 짝이 없어서 담배냄새 퀴퀴한 조그만 방에 달랑 이불 한 채로 밤을 지새며 순찰을 돌고 전화를 받고 했으니 지금 생각해도 진저리치는 일이다.
물론 통신시설도 조잡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요즘처럼 버튼 하나 눌러서 서로 통화하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일일이 찾아가 전화 왔으니 받으라고 하든지 가까운 곳에 있으면 전화가 왔다고 고함을 질러야 했다. 할 짓이 아니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다른 멀리 떨어진 건물에 있는 사람에게는 인터폰(내선전화)으로 전화가 왔음을 먼저 알리고 외부에서 온 전화기의 수화기를 인터폰의 송화기에다가 대고는 서로 크게 이야기하도록 하는 기발한 방법이 고안되었다.
아무리 어려운 일도 친한 동무가 있으면 고된 줄을 모르듯 숙직도 그랬다. 함께 숙직하는 용원의 역할은 그래서 매우 중요하다. 용원이 똑똑하면 숙직선생님은 그저 잡무나 처리하고 TV나 보다가 자버리면 되는 것이다. 밤새 용원이 알아서 전화도 받고 심지어 순회도 대신 돌아 아주 편하다.
그런데 용원들은 순박하고 거짓이 없어서 좋지만 함께 일하는 선생님들에게는 답답할 정도로 학교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대부분 초등학교 입학이 다고 졸업은 못한 경우가 많았다.
경상도 어느 산골에서 농사를 짓던 분이 어찌하다 우리 학교에 용원으로 왔다. 나도 어지간한 사투리는 알아듣는데 그분의 이야기를 들으면 한참을 생각하고 앞뒤의 문장을 새겨서야 겨우 알아들을 정도로 심한 사투리를 썼다.
내가 숙직을 하는 어느 날.
전화벨이 울리자 그분이 덜렁 전화를 받더니 대뜸 인터폰으로 다른 사람을 불러 전화기를 예의 우리가 하던 방법으로 들이대고는 크게 고함을 질렀다.
"쥐께이 세이!"
「이야기하세요. 말씀하세요.…」등 얼마나 많은 말 중에 하필 「주께다」는 경상도 북부 토박이 사투리를 거침없이 내 뱉었던 것이었다. 그리고는 숙직인 나를 대신해 자기가 일을 잘 처리할 수 있다는 능력을 보여준 만족감에 젖어 빙그레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 생각해도 우습지만 컴퓨터 같은 날렵한 사무기기가 설치지 않고 인간미 넘치던 지난 날,
풋풋한 정이 흐르던 그 때가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