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웃으며 할 수 있는 이야기

『 긴 이야기, 짧은 생각 』

일흔너머 2008. 4. 16. 11:50

 

요즘 막내는 한창 기(氣)가 살아 퍼덕이는 청춘이다.

누가 감히 그를 붙들어 둘 것인가?

하루해가 시작되면 출근을 했다가 언제 돌아올지도 모른다.

늘 붙들고 묻는 말이지만, 오늘은 또 왜 늦었느냐고 물으면 거저 친구 만났단다.

그래, 친구? 의리? 너희들 때는 다 좋은 것이다. 여북하면 「부모 팔아서 친구 사라.」는 말이 생겼을까?

 

그러나 배반을 밥먹듯 하는 요즘 세상에 진정한 친구가 있을까?

하여 어릴 때, 들었던 친구, 의리에 대한 감동적인 이야기 하나 하자.

대부분 아는 거지만 우리 막내처럼 늘 친구 좋다고 놀고 다니는 아들에게 한 아버지가 진정한 친구의 의미를 가르치는 일화다.

아들을 앞에 앉혀두고,
"너는 항상 친구 좋다며 자랑을 하는데 만약 네가 살인을 했대도 숨겨줄 만큼 믿을만한 친구가 있느냐?"
하고 물었다. 그러자 아들은 당연하다는 듯,
"그럼요."
하고 자신 있게 대답을 하는 것이다.

 

그러자 아버지는 거적에다 이불을 하나 둘둘 말아 시체가 든 것같이 만들어 지게에다 얹어서는 지고 나선다.

아들에게 가장 친한 친구의 집으로 가자고 앞장을 세운 것이다. 아들은 첨에는 자신이 있었으나 막상 대문을 나서자 이리 궁리하고 저리 궁리해도 마땅한 친구가 없었다. 놀기에 적당한 친구지 자신을 숨겨줄 그런 믿을만한 결정적인 친구는 생각나지 않았다.

 

결국 가장 자주 어울리는 어느 친구 집 앞에 가서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친구가 나오자 자기가 어쩌다 살인을 하게 되었으니 시체를 버리도록 좀 도와주고 자신을 사건이 잠잠해질 때까지 잠시 몸을 숨겨줄 것을 부탁하였다. 그랬더니 그 친구 고개를 가로 흔들고 '자기는 모른 척하고 있을 테니 자수하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사건이 복잡해지기 전에 어서 다른 먼 곳으로 피하란 것이었다. 난감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부끄러웠다.

 

몇 군데 친구 집을 그렇게 전전하였지만 모두가 거절하고 아무도 그를 받아들여서 숨겨주는 친구는 없었다. 그러자 아버지는 보란 듯이 아들을 데리고 자신의 친구 집으로 갔다. 평소 친구간에 내왕도 없고 그렇다고 들어내 놓고 사귀는 일도 없는 아버지인데 자신에게 없는 그런 각별한 사이의 친구가 있을까하며 아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아버지의 뒤를 따랐다.

 

한참 뒤 다다른 어느 쓰러져 가는 허름한 집 대문 앞에서 아버지는 나직한 목소리로 친구를 불렀다. 그리고 잠시 후, 주인이 나와서 반갑게 맞이하며 자초지종을 듣고는 주위를 살피더니 말없이 아버지의 소매를 끌고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둑한 광에다 이불로 싼 시체를 숨기더니 어쩌다가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친구를 믿는다며 마음 편히 지내라는 말과 함께 날이 밝으면 다시 상의하기로 하고 고생이 심했을 테니 우선 좀 쉬라는 당부를 하는 것이었다.

 

다음 날 날이 밝자 조촐한 아침상을 차려서 같이 밥을 먹으며 '어쩌다 이지경이 됐는가' 걱정하며 위로하는 것이었다. 물론 며칠을 같이 지내도 주인은 아무 불평이 없었고 한결같이 지냈다. 나중에 다른 곳으로 피신을 하겠다니까 오히려 자신이 소홀했으면 너그러이 용서하고 자기 집에 더 머무르라며 만류하는 것을 억지로 떠나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해서 평소 말없이 또 함께하지 않아도 마음으로 통하는 진정한 우정이 어떤 것인가를 가르쳐 준 이야기다.

 

이만 오천 사백 원, 1976년도 막걸리 한 되 백 원 할 때 육군 중위 월급

여기다 삼 개월마다 나오는 보너스, 그리고 좀 모아둔 것을 합쳐 등록금을 못내 애타는 친구의 어머니께 드렸다.

그리고 나는 하숙비가 없어 알고 지내는 여자친구에게 빌렸다.

그 여자친구, 사정도 모르고 하는 말이 '술 좀 작작 먹어라. 월급 타서 하숙비 줄 돈도 없이 다 마시면 어떡하나?'고 나무랐다.

 

엎친 데 덮친다고 그 달에 광주 화학학교에 출장을 갔다.

돌아오는 교통비가 없어서 고등군사반 훈련을 받는 고향친구를 찾아갔다.

우리 집 옆에 살아서 자주 어울렸고 평소 나보다 그가 더 나를 찾았다.

그런데 내가 필요해서 손을 내밀었을 때 그는 냉정하게 돌아서 거절했다.

광주에서 돌아오는 귀대길이 그렇게 멀리 느껴졌다.

 

제대를 하고 그 친구의 어머니는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고 나와 친구 사이는 서먹함 외엔 아무 일도 없었던 그 옛날 처음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 친구 내 곁을 떠났다.

아니 내가 그에게 곁을 주지 않았다.

차라리 인연을 끊고 그렇게 지내는 것이 내 마음이 편했다.

 

세월이 무척 흘렀다.

가끔 그 친구가 보내는 작은 관심이 친구들을 통해서 내 귀에 들려온다.

내가 어떻게 사는지 안부를 묻는다나?

딸을 시집보내며 왜 서울 친구들에게는 연락하지 않았느냐고 그 친구 가까이 사는 친구가 동창회에서 나를 만나더니 물었다.

 

도대체 무얼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하나?

꼭 내 입으로 자초지종을 말하고 그렇고 그래서 그런 친구는 만나기 싫다고 해야하나?

아니면 살다보니 이제 어느 정도 사람 보는 눈이 생겨서 더 깊은 정은 주지 않기로 맘 정했다고 말을 해야하나?

엉킨 실타래를 어떻게 한단 말인가?

풀려고 만지작거리다 아까운 인생을 허송하고 짜증만 일어나니 까짓 술 한 잔만도 못한 것 차라리 그냥 버리는 것이다.

 

광주에서 나 몰라라 하던 그 친구,

동창회 사무실에서 등뒤에서 내 어깨를 치기에 한참 얼굴을 쳐다보다가 모르는 사람 보듯 그저 고개를 갸우뚱하고 말없이 나와 버렸다.

몇 걸음 걸어나오는데 '나 모르겠나?'하는 소리가 뒤로 흘러갔다.

혼자 싱겁게 피식 웃으며 내뱉었다.

"이 정도면 나도 독한 놈이다. 그지?"

 

그리곤 자주 들락거리던 골목에다 눈을 돌렸다.

숨바꼭질하며 먼저 가겠다고 달리고 숨고 하던 골목,
그 옛날 어릴 때 추억이 서린 그 좁은 골목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