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흔너머 2008. 7. 13. 16:55

                                                                                                                                               <금강산 온정각 앞에서> 

 

그렇게 많은 돈을 주고 거기다가 입산료로 일인당 백 불을 내야한다는 것이 마음에 내키지 않아서 평소 금강산 여행을 못마땅하게 생각해 왔다. 그 정도의 돈으로 해외여행을 해도 대우받으며 잘 즐길 것을 구태여 배를 타고 고생을 하는 것이 싫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이었는지 여행객이 급격히 줄어 금강산 여행이 한때 존폐의 위기에 놓여버렸다. 결국 궁여지책으로 공무원들 등을 밀었다. 남북협력기금에서 보조를 해 줄 테니 십 구만 여 원에 이박삼일 여행을 하라는 공문이 왔다. 그것도 단체로 희망을 하고 기다려 우리 학교가 가게 되었다.


하기 싫은 일을 하면 하늘이 노한다고 하더니 그 겨울, 눈은 얼마나 내리는지 아마 내가 생각해도 이렇게 많이 내리는 경우는 태어나고 처음인 것 같았다. 속초항에서부터 날리던 눈은 이튿날 장전항에 도착했을 때는 산야가 온통 백색으로 도배를 한 것 같았다. 현대 사람들이 밤새워 길을 열어 겨우 등산을 하고 금강산을 구경할 수 있었다.


금강산 여행은 다른 해외 여행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우선 입국이나 그 절차가 까다롭기 한이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 배에서 밥을 먹고는 입국절차를 받으러 줄을 지어 나가면 저녁에 또 배로 돌아올 때 출국절차를 밟고 이튿날 또 그 절차를 반복하는 것이었다. 한번으로 끝나지 않고 매일 그러니 사람을 의심하는 것도 분수가 있지 뭐 이런 세상이 있는지 나중에는 짜증이 났다.


온정각에서 식사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목에다 패를 걸고 들어가는데 그 패에 무슨 특징이 있어서 밥값을 치르는 사람도 있고 또 이미 낸 사람도 있고 해서 똑같은 뷔페 음식을 먹는데도 차이가 났다. 결국 우리는 돈을 내지 않고 식사를 하니 몰랐지만 칠십 여 만원이나 내고도 밥값을 내는 사람도 있는 걸로 보아서 대단한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기념품 가게라는 것이 북한의 토산품을 팔기도 하고 우리의 생필품 같은 것을 팔기도 했는데 거기는 달러가 통용되었고 잔돈은 아예 사용되지를 않았다. 예를 들면 우유는 일 달러, 쵸코바는 이 달러, 이런 식이었다. 몇 센트라는 건 없었다. 거기서 느낀 것인데 이것이 바로 북한의 달러 벌이가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금강산 여행 내내 머리가 아팠다.
잠을 배에서 자니 멀미를 한 것인지 아니면 그 북한 사람들이 감시하며 이것은 하지 마라, 저것도 하지 마라 하며 통제해 대는 바람에 그런지 몰라도 두통이 끊이지 않았다. 보통 여행을 가면 안내하는 사람이 이리로 사진을 찍으면 경치가 좋다 혹은 저기가 그 유명한 것이다 이렇게 설명을 해야하는데 금강산 여행에서는 거저 이것 하면 안 된다 저것은 하지 마라는 것이 안내의 임무였다. 심지어 경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지 마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 손가락질을 [손가라 총]이라 불렀다.


우리의 명산 금강산, 그 커다란 바위 위에다가 건너편에서도 보일 만큼 큼직하게 김정숙 동지가 어떻고 김정일 장군이 어떻고 벌겋게 새겨 놓았는데 만약 통일이 되면 저걸 어쩌나 여행을 하며 내내 걱정이 되었다.


온정각 바로 앞에는 북한군 전차부대가 있었고 해금강 그 아름다운 절벽 바로 곁에 북한군 해안포대가 포문을 바다를 향해 내지르고 있었다. 언젠가 저 총을 우리 동족이 동족의 가슴에 들이댈 것이라는 우려를 했다.

결국 그 아름다운 해안, 명사십리의 백사장에서 여행객이 그것도 아녀자가 총을 맞고 여행중 생을 마감한 것이다.

 

우리 나라 사람이 총에 맞아 죽는 경우가 과연 그 몇이나 되는가?

그 일어나기 힘든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내가 잠시 우려한 일이 꿈처럼 일어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