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 그대 진정 사랑을 한 적이 있소? 』

일흔너머 2008. 7. 24. 07:58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취중에라도 좋으니 그냥 속절없이 지나간 과거를 뒤돌아보십시오.
그리고 눈을 감고 자신에게 스스로 물어 보십시오.
"알랙산드 뒤마"의 소설 "춘희"에서 보듯 "마거리트 고티에"와 "아르망 뒤발" 같이 그런 불같은 사랑을 해 본적이 있었는가?
아니면 혼자 잠 못 이루고 밤새워 한사람을 애타게 그리는 짝사랑의 열병이라도 앓아본 적이 있었는가?

 

불같이 뜨거운 사랑이든 혼자 끙끙대는 짝사랑이든 걸렸다하면 어차피 처음에는 열이 나고 머리가 여기저기 아프다가 차츰 가슴이 답답해지고 종래에는 온몸이 지쳐 쓰러지게 되는 것은 같습니다. 이것이 환자의 첫 번째 증상(症狀)이니까요. 물론 죽음에까지 이를 수 있는 큰 병이지만 이 모든 것이 다만 육체적 증상이니까 시간이 흐르면 금방 낫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랑에 빠지면 유달리 빛나고 아름다운 싯귀(詩句)가 아닌 그저 통속적인 유행가마저도 자신이 그 노래의 주인공이나 되는 것처럼 깊은 감동에 젖는 때가 있습니다. 이것도 사랑의 열병에서 빼놓을 수 없는 아름다운 증상입니다. 이런 때는 더 직설적으로 꼬집어 표현하는 경우가 시적(詩的)으로 우회하는 것보다 마음에 들기 때문입니다.

 

"조용필"의 노래 「킬리만자로의 표범」에서 보잘것없는 세상을 새삼스레 아름다워 보이게 하는 건 사랑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살아가는 일이 허전하고 등이 시릴 때 우리를 위로해 줄 것은 사랑뿐이며 거기다가 모든 것, 심지어 운명까지도 걸기 때문에 고독해 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두를 잃어도 사랑은 후회 않아야 비로소 사랑했다할 수 있답니다.

 

이세상 모든 것을 잃어도 후회 않는 그런 사랑은 잠복기가 무척 깁니다. 그러니까 보통은 사랑의 마력(魔力)이 세상의 뭇 이야기를 흥분이라는 도가니에 담아 견딜 수 없는 열기로 들볶아대지요. 그러다가 아름답고 뽀얀 안개로 감싸 토(吐)해버립니다. 이런 때문에 엔간한 강심장이 아니면 스스로 파멸하게 되고 쓰러지면 일어나지도 못하는 중증인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그러나 삶이 본래 그러하듯 참고 견디면 고통은 차라리 하나의 달콤한 추억을 만들고 역경은 오히려 쇠를 강철로 만드는 시련의 불이 됩니다. 한때 「희망사항」이란 대중가요가 크게 유행했었습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 별로 눈에 띄지도 않는 외모의 가수와 작곡자가 그렇게 청중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그 노랫말 탓이었을 겁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그렇지 않은 사람도 충분히 동감할 수 있었으니까요.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여자 … …내 얘기가 재미없어도 웃어주는 여자 …내 고요한 눈빛을 보면서 시력을 맞추는 여자 … …난 그런 여자가 좋더라. ♬♪」

노랫말에서처럼 얘기의 내용은 재미없어도 이미 둘 사이에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얘기보다는 그 분위기가 좋고 사랑하는 님의 모습이 좋으니까요. 사랑하면 그만이지 더 이상 해야할 그리고 꼭 들어야할 이야기가 특별히 있을 게 무엇이겠습니까? 쓸데없는 이야기일지라도 주위의 방해를 떠나 사랑하는 사람의 눈빛을 그저 고요히 바라보는 것만으로 행복한 순간 순간인 것입니다.

 

특히 아름다운 연인(戀人)이 물기 어린 촉촉한 눈빛으로 말없이 바라보면서 자신의 말을 들어준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너무 신나서 무슨 이야기라도 하고 싶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사랑의 울타리에 갇혀진 행복한 두 사람을 상상하는 것조차도 가슴 설레고 즐거운 일인데 하물며 당사자인 두 사람에겐 세상 무엇보다 행복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시인 "한용운"님께서는 일찍이 "님의 침묵"에서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고 사랑의 실상에 대하여 지적하였습니다.

 

또 "선사(禪師)의 설법"에서는
「사랑의 쇠사슬에 묶여서 고통을 받지 말고 사랑의 줄을 끊어라 그러면 너의 마음이 즐거우리라.」
는 선사의 말씀을 감히 부정하고 오히려 어리석다고 했습니다.
「사랑의 줄에 묶기운 것이 아프기는 하지만, 사랑의 줄을 끊으면 죽는 것보다 더 아픈 줄을 모르는 설법」
이라고 사랑의 즐거운 고통을 설파하며 나무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속박은 단단히 얽어매는 것이 풀어주는 것이어서 대해탈(大解脫)은 역설적으로 속박에서 얻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님의 사랑줄이 오히려 약할까봐 걱정하는 것입니다.

결국 사랑이란 한 치의 곁눈도 용납하지 않는 갈무리와 서로의 희망에 의한 뜨거운 속박훈련인 것입니다. 그래서 훈련이 끝나고 세월의 역사가 쌓이면 눈빛 하나로도 충분한 사이 즉 사랑의 포로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무 것도 더 바라지 않고 그저 바라볼 수만 있어도 좋은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의 중병을 앓는 또 다른 달콤한 증상입니다. 이쯤 되면 거의 완치가 불가능한 지경에 다다른 것입니다.

 

이런 일은 물론 처음부터 예견된 것은 아닙니다. 어느 후미진 골짜기에서 태어나 한가롭게 산기슭을 뛰어다니다가 우연히 만나는 사슴과 같습니다. 그러나 새싹이 움돋는 아지랑이 속에서 설레는 가슴으로 영원을 다짐하는 것은 필연입니다. 뜨거운 여름 햇살과 짙은 녹음 속에서 열정적인 사랑은 한바탕 소나기로 식어가기도 하지만 붉게 물든 단풍을 보며 그리고 고요히 내리는 싸락눈이 온 누리를 덮을 때 그들은 더욱 겸허하고 여문 사랑의 열매를 곱고 또 실하게 엮어 가는 것입니다.

 

아무도 깨어있지 않아서 주위로부터 방해받지 않는 새벽에는 가녀린 시계 소리마저도 유난히 크게 들립니다. 요즘 사회가 또 살아가는 세상이 더욱 어둡고 험합니다. 초콜릿과 함께 어쭙잖게 수입된 요즘 젊은이들의 서투른 사랑흉내가 상술(商術)을 타고 우리들 주변에서 활개를 치고 있습니다.


이런 때 진정으로 모든 것을 건 사랑은 세상에서 더욱 빛날 겁니다.
마치 어둠이 짙을수록 밤하늘의 별은 더욱 반짝이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은 모든 일을 접고 나의 운명을 걸 사랑을 찾아 먼길을 떠나렵니다.
"그대는 진정으로 사랑을 한 적이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