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웃으며 할 수 있는 이야기

『 금지(禁止)된 노래 』

일흔너머 2008. 7. 27. 09:24

 

과거의 지나간 이야기를 자주 하면 늙었다는 증거란다.

그렇다고 경험적 이야기를 빼고 앞으로 일어날 일이란 것이 쉽게 예감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어쩔 수 없이 과거를 들출 수밖에 없다.

 

나의 젊은 시절은 알게 모르게 사회로부터 받는 압박이 심했던 것 같다.

심지어 야외지질조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우리들의 지도 교수님이 장발(長髮)이라고 시골 경찰지서의 순경에게 붙들려 봉변을 당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기가 막힐 노릇이지만 그 당시에야 어디 하소연이라도 할 수 있었던가?

 

이래저래 쌓인 울분들을 막걸리와 통기타를 두드리며 부르는 노래로 날려보냈다면 믿겠는가? 정말이지 그때는 노래를 부른다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절규에 가까웠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어쩌다 행정당국에 의해 금지되기도 했다. 「고래 사냥」이나「아침 이슬」이 바로 그런 부류다.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 봐도
가슴에는 하나 가득 슬픔뿐이네.
무엇을 할 것인가 둘러보아도
보이는 건 모두가 돌아앉았네. … 』


암담하던 현실과 무거운 가슴을 너무도 잘 표현했건만 퇴폐라는 낙인이 찍히고 말았다.

그렇게 따진다면 예술이 퇴폐 아닌 것이 어디 있겠는가?

결국 체제를 부정하고 반항적인 노래만 부르다가는 가수로서도 도태되고 만다. 때문에 가끔은 정말 누가 보아도 확실하게 건전한 노래가 만들어지기도 했으니 요즘도 정부의 공익광고나 홍보에 자주 인용되는 노래들이다.


그리고 아름다운 자연을 노래하기도 하고 사람과 사람사이의 우정과 플라토닉한 사랑도 노래해야만 했다.

선택할 주제가 더 이상 용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여지(餘地)가 없었다는 뜻이다.

 

요즘 가수들이 새로운 곡을 발표하고 잠시 나왔다가 인기를 얻지 못하면 다시 사라지고 또 새로 나오곤 한다. 하지만 그들이 무슨 애절한 사연과 꼭 하지 않으면 안될 과거 우리들과 같은 그런 절박한 문제를 안고 있기나 하겠는가?

 

KBS드라마 '왕건'에서 '궁예'가 내치도 올바로 이루지 못하면서 북벌을 내세우는 것과 제3제국의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가 게르만 민족의 우월성을 내세워 유태인을 학살하고 인종청소를 하는 것도 결국 모든 국민적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자하는 독재자의 공통적 유형이다.

 

그리고 아무 것도 모르고 생각 없이 따라가는 개인의 입장은 쉽고 편했을 것이다.

그러나 개성이 강하고 삶의 목적이 뚜렷한 자유인에게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밤새워 고민하고 가슴 아파한 결과  우리의 곁을 맴돌고 있는 아름다운 분위기의 잔잔한 통기타 노래들로 승화되고 역설적이게도 그 당시의 억압은 결국 그런 문화를 있게 한 거름이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는 풀어야할 숙제를 바로 눈앞에 두고 확실하게 나아갈 수 있었다는 것이 오히려 행운이라 여겨진다.

이런 맥락에서 그 지독한 과거의 독재정치가 문화발전에 기여했다고 한다면 나만의 역설(逆說)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