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말과 글 』

일흔너머 2008. 8. 1. 10:37
 

 

"왼쪽보다 오른쪽 시력이 좋습니다."

일반적으로 의사는 나쁜 곳을 치료하여 정상적으로 고쳐주는 것이 그들의 임무라고 볼 때 환자의 자존심을 고려치 않고 나쁜 곳만 꼬집어 얘기하는 것이 보통의 경우다.

 

그런데 어떤 안과의사의 진단결과는 엉뚱하게도 왼쪽이 나쁘다는 말을 환자의 오른쪽의 시력이 좋다고 할 때 오히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상대의 자존심을 고려한 의사의 숨은 배려가 작고 조용한 감동으로 젖어든다. 물론 이런 일은 우리의 주위에 흔치 않다.


사건이나 감정을 말로 표현하는 것은 쉬우나 그 말을 글로 쓰는 것은 어렵다. 이것을 글로 표현한 경우, 굳이 문체로 나누어 문어체(文語體)와 구어체(口語體)로 구별한다. 헤밍웨이는 쉬운 구어체로 소설을 써서 새로운 장르를 우리에게 선보였다. 때문에 '노인과 바다'같은 소설은 일상의 대화가 많아서 중학생 정도의 영어실력으로도 읽을 수 있다.


또 우리에게 잘 알려진 '빠삐용'이란 프랑스 깡패출신 건달의 이야기는 주인공이 말로는 신나게 잘 할 수 있어도 글을 쓸 줄 몰라서 옆에서 녹음하고 이야기한 것을 정리한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재미난 이야기나 의사(意思)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방법이 말과 그리고 문자가 있되 그 성격이 판이하게 다른 것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상황이나 생각을 전달하려면 전하는 사람은 흔히 말하는 '자초지종(自初至終)'을 이야기해야한다. 주위의 여러 가지 배경과 느낌까지도 차근차근 설명되어져야 한다.


삼국지(三國志)에 보면 서주(徐州)의 원소가 조조를 공략할 때 서기(書記) 진림(陳琳-자는 孔璋이라 함)에게 조조를 성토(聲討)하는 글을 짓게 한다. 본시 진림은 문명이 높아 환제때 주부벼슬을 하다가 동탁의 난을 피해 기주에 피난해 있던 중에 원소의 막하로 들어온 인물이다. 진림은 멋들어진 조조의 성토문을 짓고 그것을 등사(謄寫)하여 조조의 진중에 방을 붙이고 뿌렸다.


일종의 격문이며 내용은 조조는 조상이 내시이며 덕망이 없고 간사하며 역적이니 잡거나 죽이는 경우 후한 상급을 내린다는 것이다. 물론 내용보다 그 문체가 보는 이의 감정을 자극하여 조조를 꼭 죽이고 충성을 해야겠다는 마음가짐이 되도록 지어지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하북(河北)땅이 조조에게 평정되고 기주성(冀州城)이 함락 될 때 진림은 잡히는 신세가 된다. 그리하여 조조에게 끌려나와 심문을 당할 때 대담하고 멋진 일화를 남긴다.

 

"너는 전에 원소를 위해 격문을 지었을 때 욕을 하려면 나나 욕 할 것이지 나의 조부까지 들추어서 욕을 했으니 너무나 지나치지 않았는가?"

젊잖게 나무라는 조조에게 진림은 빙긋 웃으며,

"활을 쏘자면 살(箭)을 시위(弦)에 걸어야 비로소 살이 날지 아니하오?"

라고 대답한다.


그렇다. 

서로가 눈빛만 보아도 알만큼 오래 사귀어 역사가 만들어진 사이거나 아니면 불교에서 참선으로 도(道)가 통한 경우 염화시중의 미소라는 말과 글 이전의 차원이라면 다르다.

그렇지 않는 경우 아닌 밤중에 홍두개식으로 불쑥 내 놓는 의견과 주장은 이해하기도 힘들고 아무에게나 통하지 않는다.

 

어차피 나의 의견이나 주장을 상대에게 알리는 것이 말과 글이라면,

안과의사처럼 듣는 상대방의 감정을 최대한 고려하여 말하든지 아니면 '이러이러하니 저래서 그렇지 아니한가?' 라고 차분히 앞에 있던 내력을 진림처럼 펴 가는 것이 좋은 문장이 되고 바른 말과 글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