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 돌 솥 밥 』

일흔너머 2008. 8. 22. 10:21

사람들은 추운 겨울이 되면 [돌솥밥]을 좋아한다.
단지 돌솥에서 지었다는 이유 외에는 평범한 밥으로 영양이나 맛이 좋은 것도 아닌데 억지로 돈을 더 치르면서까지 사 먹는다.

사실, 음식에서 영양이 좋다 나쁘다는 것은 지을 때 넣는 재료에 관계하지 솥이 주는 영향은 미미하다. 또 밥맛이 좋아서라고 하지만 맛으로야 압력솥에서 지은 밥맛만큼 좋은 것은 없다.

 

이런저런 이유를 대보지만 사람들이 돌솥밥을 좋아하는 이유는 우리의 짐작을 벗어난 영 엉뚱한 데 있는 것 같다. 영양이나 맛이 아니라 돌솥밥 메뉴에서 만들어지는 구수한 숭늉이 그 이유다. 밥을 퍼내고 뜨끈한 돌솥에 눌어붙은 누룽지에다 물을 붓고 기다리면 뜨끈뜨끈한 숭늉이 되고 그것이 사람들을 유혹하는 것이다.

 

요즘은 어지간히 후미진 산골이 아니면 대부분 전기밥솥을 이용하여 밥을 짓는다. 예약되어 정해진 시간에 어제와 꼭 같은 밥을 지어놓고 주인을 기다리는 전기밥솥에서 감히 누룽지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누룽지가 없으니 억지로 만들려고 하지 않으면 숭늉이 없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크다란 가마솥에 불을 지펴 밥을 했기 때문에 조금만 실수를 하면 누룽지가 두텁게 눋고 거기다 물을 부어 구수한 숭늉을 만들고 이것이 일상의 음료였었다. 그러나 숭늉이 사라진 요즘은 식후에 차를 마신다. 아니면 서양바람이 들어서 고기를 잔뜩 먹은 느글느글한 속을 커피로 푸는 것이다.

 

요즘 음식문화는 우리들이 알게 모르게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옛날에는 솥에서 밥을 퍼 담을 때도 요즘처럼 꼭 같은 공기에 아무렇게 담는 것이 아니라 서열(序列)이 있었다. 밥을 지을 때 보리쌀 삶은 것을 솥바닥에 깔고 먹다 남은 식은 밥도 솥 가장자리 한편에 얹고 난 뒤에야 불을 지피고 밥을 했기 때문에 같은 솥 안에 있어도 똑같은 밥이 아니다.

 

그래서 밥이 다 되었다고 요즘처럼 솥에 있는 밥을 한꺼번에 섞어 똑같은 공기에 퍼 담지는 않는다. 거친 보리밥과 식은 밥을 어른들의 밥그릇에 차마 담지는 않았다. 자연스럽게 노약자를 배려한 서열이 생긴 것이다. 할아버지 먼저 새하얀 쌀밥으로 담고 다음 아버지 그리고 사랑하는 자식들 순으로 담는다.

 

그리고 정작 밥을 짓고 수고한 어머니는 맨 나중에 남은 보리밥이나 아니면 그것도 눌어붙은 누룽지를 퍼 담는 것이다.

어떤 때는 밥이 모자라 어머니가 아예 솥바닥을 달달 긁어 담는 것을 보며 자란 우리들은 어머니의 가족사랑과 희생을 누가 말하지 않아도 가슴으로 느끼고 성장하였다.

 

물론 요즘같이 풍요로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사람들이 이런 과거를 이해하기는 힘든다.

결핍된 상황에서 쪼개고 나누던 그때 더 진한 가족사랑을 만들었고 물자가 남아도는 지금이 오히려 서로를 배려하지 못하고 맛있는 것 좋은 것을 자기가 먼저 차지하려다가 화합이 깨지고 가정의 파탄이 잦은 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인간의 본능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식욕도 서로를 배려하고 예의를 갖추며 살았던 그 시절이 구수한 숭늉처럼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