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간 디 』

일흔너머 2008. 8. 29. 09:07

 

                    

                                                  Mohandas Karamchand Gandhi(1869-1948)

흔히 오대양육대주(五大洋六大洲)라고 한다.

그런데 오대양이 어디고 육대주는 어디를 가리키는가를 막상 물으면 또박또박 섬기는 사람은 드물다.


해양학에서 대양(大洋)은 수괴(水塊)가 클 것, 그리고 육지에 의해 분리될 것을 조건으로 한다. 때문에 태평양, 대서양, 인도양, 이렇게 3대양으로 불리고 우리가 대양으로 아는 북극해나 지중해는 태평양에 비해 너무 작아서(1%가 안 된다.) 그냥 내해(內海)로 불린다. 그러나 보통은 습관적으로 오대양이라 한다.

 

육대주도 마찬가지다.

그 중에도 우리가 곤드와나에서 출발한 대륙이라고 평소 생각하는 커다란 인도는 우습게도 히말라야산맥 이남(以南)의 우리나라와 같은 반도(半島)이다. 물론 우리와는 비교할 수 없는 크기와 10억의 다양한 종족의 인구와 복잡한 자연과 문화 그리고 종교까지도 다양하다. 단일민족에다 한 가지 말과 글을 쓰는 우리가 다양성을 특징으로 하는 인도를 이해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우리가 일본의 식민지로 암울한 시절이 있었듯이 인도 또한 영국의 식민지로 고통받는 시련의 시대가 있었다는 공통점이 야릇한 친밀감을 가지게 한다. 특히 미래에 대한 희망적인 일이란 없고 오직 하루하루의 고통스런 식민지 백성의 삶에서 헤쳐나갈 비젼을 제시하고 이끌어간 걸출한 지도자가 있었다는데 대해 우리의 어려운 현실에서 더욱 관심이 간다.

 

인도의 훌륭한 지도자 그는 모든 인도국민의 추앙을 받아〈위대한 영혼 : 마하 트마〉〈아버지 : 바푸〉라는 존칭이 그의 이름 앞에 항상 따라 붙는다.
『 마하 트마 간디.』
고등학교 다닐 때 읽은 자서전을 대학시절 다시 읽으며 아힘사(비폭력)에 대하여는 회의도 가졌지만 사티야그라하(진리파악)에 대하여는 더 절실한 감동을 받았다.

 

또 간디의 사진 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물레 앞에 동그란 안경을 끼고 앉아 조용히 실을 뽑고 있는 모습이다. 영국의 직물 불매운동으로 농촌의 자급경제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지금의 우리나라 형편에서는 그들이 영국에 대항하여 벌인 스와데시(국산품 애용)운동이 필요할 지도 모른다. 선각자의 의지를 자꾸 돌아보는 것은 현실이 그만큼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몇 해전에 내가 가까이 두고 자주 보던 간디의 자서전을 제법 아끼던 제자에게 주면서 항상 읽어보라고 권했다.
자서전에서는 주로 구자라트의 사바르시티에 설립한 아시람이란 공동가족의 생활과 사회봉사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자신의 가족과 사생활이 주된 내용이다.

 

여기서 간디는 무소유(無所有)와 채식주의에 대하여 많은 양의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처음 유학을 떠날 때 부모와 한 약속을 영국에서의 생활뿐만 아니라 평생을 통해 채식을 실천하고 있다. 심지어 아버지 간디의 영향을 받은 자식들도 채식을 하고 있다. 서양의사가 영양실조이니 고깃국물을 먹으면 금방 나을 수 있다고 했을 때 아버지로서 많은 갈등을 가지나 아들이 결국 아버지를 따라 오랜지쥬스만을 고집하고 보름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병이 회복되는 것으로 신념이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는 한 예이다.

 

사후(死後)의 소지품을 보면 만년필 한 자루와 평소 그가 신고 하루에 보통 여섯 시간이상씩이나 산책하던 나무로 된 슬리퍼-나는 종종 학생들에게 이 평평한 나무 조각에 발가락을 끼워 신을 수 있도록 만든 단추 하나 달랑 달린 그런 신발을 그림을 그려 가며 설명해 주기도 한다.-그리고 간디의 트레이드마크라 할 수 있는 동그라미 안경이 고작이었다.

 

평소 여러 사람들에게서 받은 선물과 또 변호사로서 일하고 받은 수임료는 반대하는 부인을 설득하여 공동체 생활에 모두 내놓은 것이다. 장래 자식들을 출가시킬 때 필요한 재물을 걱정하는 부인을 여러 날 동안 설득하는 내용은 지도자로서도 부부생활에서 자기의 신념을 부인에게 이해시키는 것이 어려웠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종족번식을 위한 성생활 외에는 죄악임을 인식시키고 부인과 같이 금욕생활을 실천하고 있다. 요즈음 우리 사회는 서양의 풍조가 잘못 전해져 성생활이 인생의 목표인양 누구나 욕망에 빠져 허둥대며 살아가는데 많은 반성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런 면에서 조그만 체구의 이 지도자는 차라리 구도자(求道者)에 더 가까운 성인(聖人)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48년 인도의 분리독립(파키스탄과 인도)을 반대하며 애쓰던 중 델리에서 극단적인 힌두교도에 의해 암살될 때까지 생애 11회의 단식과 영국의 통치에 불복하는 운동을 하였으며 인도의 독립과 평화유지에 몸을 바쳤다.

 

한창 동서로 나뉘어 양 진영의 대립이 심각하던 냉전시대에 동양의 체구 조그만 늙은 이(?)의 죽음을 자유민주주의 국가든, 사회주의 국가든 상관하지 않고 그야말로 오대양육대주의 전세계가 함께 슬퍼한 장례식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도 인도인의 자존심으로 남아있는 것은 빛나는 기념관과 커다란 동상이 세워져 있기 때문이 아니고 바로 「마하 트마 간디」의 정신을 모두 추앙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