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콩을 고르듯 산다 』
누가 날보고 시인이냐고 물으면 나는 고개를 가로 흔든다.
평소 시를 쓰고 내 이름으로 시집을 냈지만 감히 시인이기를 망설인다.
왜냐하면 그저 시가 좋아 시를 쓰고 내 시를 다른 사람들이 읽으니 시집을 냈지 그 시집을 팔아 밥을 구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가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노래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당신은 가수이냐고 물으면 대부분 고개를 가로 흔들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그저 노래가 좋아서 노래를 부르지 노래를 부르는 이유로 돈을 챙기고 그 돈으로 생계를 유지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만약 노래 부르는 모든 사람을 가수로 친다면 우리나라는 온통 가수로 뒤덮일 것이다.
그리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을 화가로 친다면 마찬가지로 발길에 치이는 사람이 모두 화가일 것이다.
다만 혼자 좋아서 하고 즐기는 것을 직업적 이름을 가져다 붙이는 것은 그 직업을 너무 가벼이 여기는 것일 뿐만 아니라 즐기는 사람의 인격을 무시하는 처사일 것이다.
요즘 친구의 팔순 자당(慈堂)은 바쁘다.
평소 치매가 있어 사람도 잘 몰라볼 뿐 아니라 외출했다가 집을 못 찾아온 경우도 더러 있었다. 그래서 바깥출입을 못하게 곁에서 항상 지켜야한다. 그런 노모는 요즘 집에서 할 일을 찾았다. 그것도 잠시를 쉬지 않고 하는 일이다. 처음에는 너무 열심히 해서 코피를 쏟았단다. 도대체 뭔 일인가 하고 물으니 콩을 고르는 일이란다. 파란 콩과 노란 콩이 섞여있는 것을 고르는 일이란다.
친구 아내가 콩을 가지고 그 자당 앞에서,
「아비가 몸이 좋지 않아 죽을 좀 쑤어 주려는데 콩이 섞여있어서 골라야합니다. 시장에 가면 골라놓은 콩이 있지만 너무 비싸서 이렇게 섞인 콩을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대충 이런 이야기를 했단다. 그러니 그 자당은,
「그래, 내가 집에서 놀면서 하는 일이 뭐 있나 콩이나 고르지. 다 가져 오너라.」
하며 그 때부터 콩을 고르는 일을 하게 되었단다.
보통 낮에는 낮잠도 한 두시간 주무시는 것이 습관이었는데 이제는 콩을 고르느라 아예 누우시지도 않는단다.
잠시를 쉬지도 않고 콩을 고르는 것이다.
그 많은 콩을 고르면 다 어디에 쓰느냐고 묻는 내게 친구 부인은 웃으며,
「잘 골랐네요. 이것도 골라주세요.」
하며 골라진 콩을 돌아서서 다시 섞어 준다는 것이다. 그러면 또 그 자당은 열심히 파란 콩과 노란 콩을 골라낸다는 것이다.
정상적인 우리가 보면 한 마디로 사람을 욕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치매에 걸린 자당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취미생활을 주는 며느리가 마냥 고마울 따름이다.
선진국의 노인요양시설이라고 별 수 없다. 거저 동그란 고리를 이쪽 나무 기둥에 끼웠다가 또 저쪽 나무기둥에 뽑아 옮기는 단순한 작업을 수없이 하는 걸로 하루해를 보내는 것이다. 모양이 다르고 장소가 다를 뿐 치매노인들이 시간을 죽이며 늘그막에 말 그대로 여생(餘生)을 보내는 것이다.
모르는 것이 사람 앞날이다.
나도 오래지 않아서 주위를 둘러볼 여유 없이 친구의 자당처럼 단순히 콩을 고르고 있을 지도 모른다.
물론 시를 쓰는 지금이 행복한지 콩을 고르는 먼 훗날 그때가 더 행복한지 판단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다른 사람들이 요즘의 나를 볼 때 퇴직을 하고 할 일 없이 빈둥빈둥 노는 것처럼 보일 지도 모른다.
그래서 노느니 차라리 콩이나 고르지 하며 나무라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직은 내가 콩을 고를 때가 아니다.
그보다는 더 창의적이고 복잡하며 누가 읽고 그 느낌이 삶의 윤활유가 되는 그런 작업이라고 나름대로 자부하며,
콩을 고르는 시간처럼 시를 쓰고 소설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