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 스쳐 가는 인연 』

일흔너머 2009. 2. 8. 00:05

 

 

파계사 능선 길을 걸었다.

한겨울은 지났지만 아직 잔설 속에 추위가 우두커니 남아 있어 계곡을 올라온 바람은 정나미가 떨어졌다. 하지만 머잖아 진달래 꽃송이가 흐드러지게 필 것이란 기대로 산 속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산길을 걷다보면 마치 친한 친구가 더 놀다가라는 듯 앞을 딱 가로막는 나뭇가지들을 만난다. 제법 어린 아이 팔뚝 정도 굵은 나뭇가지들이다. 고개를 숙이고 몸을 낮추어 피해야 한다. 몸을 낮추면 부딪힐 일은 없다는 것이 등산길에서도 통한다.


가만히 보면 사람들은 용하게도 나무들이 서 있는 숲 사이사이를 뚫고 길을 만들었다. 오르락내리락하며 등산길은 이어져 있다. 나무들은 이웃 간에 정이 많은가 보다. 소나무가 띄엄띄엄 서 있는 아래 키 작은 떡갈나무와 진달래가 함께 인연을 맺으며 헝클어져 자란다. 간혹 길 가장자리 옆에 선 나무 중에는 뭇 사람들의 손길에 닳아 반질반질 윤이 나는 나무가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그 나무를 잡지 않으면 발 디딜 곳이 마땅치 않아서 위험한 곳이다. 결국 이 닳아 비틀어진 나무는 그 많은 등산객들이 도와달라고 내미는 손에 기꺼이 자신의 몸을 내준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도 모르고 잠시 나무를 잡고  용을 쓰며 자신의 안전을 위해 버둥대다가 위험에서 벗어났다 싶으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잡았던 손을 떨치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그 자리를 벗어나 짧은 인연을 끊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나무는 다르다. 그 자리를 꿋꿋이 지키며 다음 사람 또 다음 사람 이렇게 만나는 인연을 이어간다. 고달프다고 아우성치거나 잠시 휴식을 위해 자리를 뜰 줄도 모른다. 그렇게 시달린 몸이 그 윤기 반질거리는 자국이 된 것이다. 언제부터 시작된 인연인지 몰라도 이미 나무의 표피는 다 닳아 없어지고 하산 길 올려다 본 내 눈에 훈장처럼 빛나고 있었다.

 

아마 나무는 사람들의 손에 흔들리고 닳고 부러져 오래지 않아 죽고 말 것이다. 저 나무로 인해 안전하게 이 길을 스쳐간 사람들은 이렇게 나무가 말라 죽어갈 것이란 것을 모른다. 아니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살아가는 내내 곁에서 위험을 지켜준 것도 아니고 겨우 한번 스쳐 가는 인연에 잠시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등산길에는 그런 나무가 많다. 그저 잡았다 놓아주고 또 다른 나무를 붙잡고 그렇게 길을 헤매는 것이다. 마치 험한 세파를 헤치며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자리를 벗어나면 너무 쉽게 잊어버린다. 그리고 나무가 우리와 인연을 맺고 그렇게 살다갔다는 걸 잊은 채 산을 내려오면 거저 앞만 보고 바쁘게 달려가는 것이다.

 

주변에서 저 나무들처럼 손만 내밀면 쉽게 잡을 수 있는 인연들이라고 언뜻 언뜻 스쳐가면서 고마운 이웃들을 너무 쉽게 잊어버리는 일은 없는지 파계사 계곡을 내려오면서 자꾸 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