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흔너머 2009. 3. 23. 12:11

 

 

디지털 카메라로 강가에 선 나의 모습을 찍어준 친구가 있다.

그 중 잘된 몇 장을 이메일로 보내주었는데 같은 학교에서 근무하는 선생님께서 보시고 물었다.
"이 사진 누가 찍어 주었습니까?"
"친구가요."
"……"

 

그리고 그 친구가 있는 국민학교 소풍 때 찍은 구겨진 낡은 흑백사진도 보여 주었다.
"그 친구가 여기 이 친군데……"
"선생님은 어디 있어요?"
낡고 구겨져 희미한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던 젊은 선생님이 물었다.

 

그럴 수밖에……. 그 사진 속에는 조그만 초등학생 대여섯이 단체로 사진을 찍었는데 아무리 찾아도 당사자인 내가 보이지 않으니 의아해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설명을 해 주었다.

소풍을 가서 아무나 사진을 찍을 수 없었던 세대라는 것을.

 

특히 단체사진은 몰라도 혼자 나오는 독사진은 더더욱 그랬다. 그게 돈이 얼만데 감히 독사진을 찍는단 말인가. 특별한 이유도 없이 소풍가서 말이다. 그래서 소풍가기 전에 부모님의 허락을 받는 것이다.
"엄마, 나 내일 소풍가면 사진 한 장 찍는 데이…."
"쓸데없이 사진은 무슨 사진……, 고마 치아라."
하면 아무리 친구들이 사진 찍자고 해도 안 되는 것이었다.

 

부모님의 눈치를 살피고 기분이 좋을 때를 틈타 어리광을 섞어서 얘기하면,
"알았다. 고만 보채고 자자"
그러면 허락이 떨어진 것이다. 그것도 아주 친한 친구와 장소를 골라서 한 장정도 찍고 그리고 그 사진을 뚫어져라 돌려보던 시대였던 것이다. 이런 사정을 요즘 세대들이 어찌 쉽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사진을 찍어준 그 친구는 우리가 다니던 국민학교에서 좀 떨어진 곳에 과수원을 하는 부모님을 두었는데 대단한 부자였다. 하얀 남방과 반바지에 스타킹을 신고 란도셀을 둘러맨 총명한 귀공자였다. 지금도 그때의 분위기가 남아 있지만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머리가 빠진 중년이 되어있다.

 

사진하면 생각나는 일이 또 하나 있다.
우리 장모님은 경주 만석꾼 집안의 무남독녀였다. 내가 결혼하고 처음 처가의 이런저런 것들을 둘러보다가 놀란 것이 장모님 결혼할 당시의 물목(物目)이었다. 전답뿐만 아니라 세 명의 몸종이 물목에 적혀 따라온 것이었다. 그러니 결혼식 사진은 천연색으로 당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전하는 말로 쌀 한 섬을 주고 찍었다나…….물론 흑백으로 찍어서 세밀히 칠한 것이지만.

그리고 사람 좋다는 소리 듣던 장인어른은 그 재산들을 거들 내고…….

하기야 요즘은 디지털 카메라로 찍어서 인쇄를 하면 원하는 만큼 언제나 얼마든지 가질 수 있는 것이 사진이다 때문에 지금 이런 이야기는 곰팡내 나는 케케묵은 이야기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