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웃으며 할 수 있는 이야기

『 과거는 흘러갔다. 』

일흔너머 2009. 3. 27. 11:23

  

 

나뭇잎이 단풍든 것 같은 울긋불긋한 색의 머리칼을 하고 시내를 활보하는 젊은이들이 부쩍 늘었다.


염색한 머리를 보고 있노라면 이범선씨의 소설 '오발탄(誤發彈)'이 생각난다. 전쟁(6.25)이 끝나고 먹고살기가 힘들어 허둥대던 우리는 모든 생활들이 미국이 주는 구호물품에 의존되고 가치관이 혼돈된 사회는 사수(射手)의 의지(意志)에 상관없이 발사된 오발탄에 비유된다.


요즈음도 미군부대가 주둔해 있는 곳에는 흔히 있는 일이지만 소설에서 주인공의 누이가 소위 우리의 국방을 도우러온 양키와 어울려 그들의 성(性)노리개가 되고 그 대가로 몇 푼을 받아 화장품과 옷을 사는 그런 그늘진 생활을 그리고 있다.


이런 소설들을 읽고 실제 주위에서 '양공주'라는 아가씨들과 '양아치'라고 비하해 부르는 이들을 보고 그 혼혈아들과 함께 자라며 살아온 세대인 나는 머리를 염색하는 것이 슬픈 과거를 보는 것 같아 무척 마음에 걸린다. 특히 노란 금발은 그런 이미지 때문에 거부감이 더욱 심하다.


소설 오발탄은 영역되어 미국에서 벌어진 무슨 문학작품대회에 참가하여 작품성에 비해 낮은 평가로 가작정도를 받은 걸로 기억하는데

『신문지쪼가리를 움켜쥐고 공동변소 앞에서 줄지어 발을 동동 구르는 심정을 수세식화장실에 걸터앉아 있는 사람은 모릅니다.』

라고 돌아오는 길에 불만에 찬 작가가 한 말이 아주 인상적이고 아직도 생생하다.

 

전쟁이 끝나고 그 혼란한 사회에서 살아남고자 발버둥치는 우리들의 심각성이 동양의 먼 나라에서 보잘것없고 하찮은 일로 그들에게는 관심거리가 될 수 없었으며 그저 모든 것이 남의 일로 보였을 것이란 이야기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나라에서 젊은이들에게 인기 있고 귀여움 받는 할리우드의 '맥 라이언'이란 여배우가 고액을 받고 우리 나라 어떤 회사의 CF를 촬영했는데 기자가 이번에 촬영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동양의 어느 조그만 나라에서 수녀 옷을 입고 자전거를 타고 가는 이상한 짓을 하라고 해서 자신도 왜 그러는지 잘 모르겠다고 대수롭잖게 이야기하여 말썽이 된 적이 있다. 그만큼 그들에게 우리 나라가 강대국 미국 외에는 그저 한 작은 오지(奧地)로밖에 인식되지 않는 것이다.


암살된 미국의 흑인 인권운동가인 '마르틴 루터 킹' 목사는 흑인들이 자긍심 없이 백인들을 따라 하얗게 분바르고 화장하는 것을「검은 것이 아름다운 것이다-Black is beautiful !」고 나무라고 있다. 그렇다. 흑인에게는 검은 것이 그들의 길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미국인들이 대수롭잖게 여기는 우리에게도 우리의 색깔이 있고 나아가야만 할 우리의 길이 있다. 그 길을 가리키는 훌륭한 지도자가 우리에게도 있었다면 노랗고 빨간 머리가 저렇게 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우리가 기억하던 슬픈 역사책 한 장을 넘겨 버리고 과거는 흘러 가 버린 것이다.


다양하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는 다양한 머리색깔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