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 혼자만의 착각인가? 』
젊은이가 처음 사회에 발을 들여놓고 적응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업무를 잘 몰라서 그렇기도 하지만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해서 더 큰 어려움을 겪는다. 그 단체 만이 가지는 룰(질서) 말이다.
나는 처음 사회생활을 경험한 것이 군이었다.
약관 이십 사세에 육군 소위를 달고 천방지축 날뛰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줄도 모르고 그저 계급만 믿고 좌충우돌한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한편 우습기도 하고 한편 부끄럽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도 떳떳한 것은 돈을 몰랐다는 것이다.
예비군 순회교육 교관으로 임명된 적이 있다.
순회교육이란 일상으로 바쁜 예비군들을 위해 교관이 그 지역으로 직접 찾아가서 훈련을 시키는 것을 말한다. 조교 대여섯을 데리고 가면 지역 예비군 중대에서 모든 인원과 물자의 도움을 받는다. 거기서 예비군 중대장들은 장난을 치는 것이다. 훈련을 기피하는 사람들로부터 돈을 받고 훈련을 빼주는 것이다. 그러면 그 돈을 일부는 자기가 갖고 나머지는 교관에게 준다.
그 때 소위, 중위의 월급이 대략 2만원 근방이었다. 그런데 돌아올 때 거금 오십만 원을 봉투에 넣어 주는 것이었다. 나는 깜짝 놀라 그 돈을 사절하고 도망치듯 부대로 돌아왔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것은 나에게 주는 것이 아니었다. 돌아와 대대장에게 일부를 주고 나머지는 연대 인사주임에게 주어야 했던 것이다. 그런 것을 모르고 그냥 왔으니 다음에 다시는 순회교육 교관으로 차출되는 일이 없었다. 자대의 교육이나 작전에 참가하고 어슬렁거리며 노는 그런 예비군 상대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제대를 하고 학교에 근무하면서 ‘설마 학교는 그런 부조리가 없겠지’하고 정말 떳떳하게 아이들만 가르치면 될 줄 알았다. 그러나 학교도 마찬가지였다. 과학과 실험기구를 구입하는 경우 교재상에서 몇 퍼센트의 흔히 말하는 커미션을 주는 것이었다. 정말이지 처음에는 얼굴이 확확 달아오를 정도로 부끄러웠다.
그러나 선배 선생님들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바라보면서 이번에는 얼마를 받았느냐 그러면 어디서 회식을 하자는 식으로 나를 끌고 갔다. 처음이 문제지 두서너 번만 지나보라. 양심이고 뭐고 아무렇지도 않다. 이렇게 차츰 물들어 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편해지는 것이었다.
도시로 전근을 와서는 그 정도가 더했다. 보충수업을 할 때 사용하는 부교재도 채택료라는 걸 받았다. 작게는 정가의 십오 퍼센트에서 많게는 삼십 퍼센트까지 다양했다. 이것도 처음에는 당황스러웠지만 부끄러운 말이지만 채 이년이 되지 않아서 적응이 되는 것이었다.
가정방문이란 것도 ‘왜 없어져야 하는가?’그 이유를 알만 했다.
실제 가정방문은 꼭 필요한 것이지만 그 폐해는 부모들의 극성과 맞물린 돈 봉투 때문인 것이다. 학생을 가르치기 위해 학생을 파악할 때 가정방문 이상 좋은 방법은 없다. 특히 어느 정도의 나이가 되는 고등학생이면 학교와 가정 사이에서 가릴 것은 가리고 잘못인 줄 알면서도 자신의 치부를 잘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 폐해 때문에 훌륭한 지도방법인 가정방문이 없어진 것이다.
이렇게 우리 사회에는 부정과 부패가 알게 모르게 퍼져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정치권에서는 더하면 더했지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어느 돈 많은 사람이 국회의원이 되고 싶으면 무슨 당의 전국구에 이름을 넣어 달라고 공천 헌금이란 것을 낸다. 그러면 그것으로 당을 운영한단다. 웃기는 것은 그러면 국회의원이 된 사람은 본전 생각이 나지 않을까. 돈의 규모도 대부분 크다. 그저 몇 억씩이다. 이래서 국회의원들의 말을 믿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면 진짜 규모가 큰 이야기 한번 해 보자.
지금 누구라고 이름은 구태여 대지 말자. 온 국민이 다 알고 또 지나간 일이니까.
햇볕운운 하면서 오억 불을 주었단다. 오억 원이 아니라 오억 불 말이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공무원이 그냥 주었을까? 적어도 십오 퍼센트에서 크게는 삼십 퍼센트다. 그것도 영수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본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오직 한 사람 북쪽의 김 아무거시만 입을 열지 않으면 아무도 모르는 비밀인 것이다.
서울 답방 어쩌고 하더니만 햇볕을 덜 쬐었는지 정권은 두 번이나 바뀌었지만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당시에는 곧 통일이라도 될 것 같이 떠들더니만 말이다. 오억 불이라고 해 놓고 이억 불을 주지 않아서 그런가. 다음에 준다, 다음에 준다하고 미루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서울 답방이 이루어지지 않았는지 또 누가 알겠는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우리의 선생님을 믿어야지 청문회까지 다 하고 지난 이야기가 아닌가?’하겠지만 서슬이 시퍼렇던 박정권 때 김영욱이란 중앙정보부장조차도 돈 가방 둘러매고 달아나지 않았든가. 배달사고는 마약장사나 밀수꾼들만 일으키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다 욕심 탓이다.
별을 네 개나 달고도 모자라 억지로 대통령까지 하고 그것도 모자라 수천억을 긁어모은 사람이 무슨 암인가로 다 죽어간다는 뉴스가 인터넷에 올라있었다.
인터넷, 좋다.
그저 그렇거니 하면서 바라보고 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