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 카스텔라 』

일흔너머 2012. 1. 19. 13:45

 

 

몸무게를 줄이려고 어지간한 군것질은 모두 접었다. 특히 빵은 알레르기 때문에 멀리했지만 산책을 하고 돌아오며 세 살 손녀를 위해 빵집에 들른다. 노릇하게 구워진 카스텔라, 주름잡힌 종이에 아주 탐스럽게 담겨져 있다.

 

많이도 필요 없다. 그저 두 개면 족하다. 그것도 한꺼번에 다 먹는 것이 아니다. 아직 어려서 반을 갈라 조금씩 떼 주면 한참 딴 짓을 하다가먹는데 관심이 별로 없다. 어루고 달래어 겨우 몇 조각 먹인다.
 
어제는 떼어낸 조각을 손에 들고 기다리기가 하도 거추장스러워 나도 모르게 입에 넣어버렸다. 사르르 녹는다. 늙은이의 무딘 입에도 부드러운 맛이 느껴진다. 빵이 어찌 이렇게 부드럽고 맛있는지 손녀에게 주려던 걸 잊고 몇 조각 더 떼어먹었다.
"그래, 이 맛이야!"
무슨 광고문자같이 선명하고 부드러운 느낌이 확 다가온다.

 

몇 년 전 나카사키에서 일본인들이 소위 '나카사키 카스텔라'가 유명하다고 사라며 권했지만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워낙 일본이라면 싫어하는 탓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애초에 빵을 싫어하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아픈 지난날의 기억 때문이었다.

 

우리 모두가 그랬지만 어릴 때 정말 어렵게 살았다. 하지만 그때도 카스텔라는 있었다. 어렴풋 기억나는 일인데 어쩌다 생긴 카스텔라 빵 두어 개를 둘러앉아 나누어 먹은 적이 있었다. 배고픈 우리들에게 빵 두어 개는 흔히 이야기하는 '황새 조개 한 알' 까먹는 처지였다. 욕심껏 먹을 수가 없었다. 서로 눈치를 보며 조금씩 조금씩 떼먹었다.

 

하지만 빵은 금방 다 사라지고 빈 종이만 남았다. 이야기를 나누며 습관처럼 손이 나갔지만 빵은 없고 종이에 붙은 부스러기를 긁는 꼴이 되었다. 결국 어머니가 종이를 비벼 떨어져 나오는 빵가루를 툭툭 털어 입에 넣어주며 하는 말,
"이건 먹는 종이였으면 좋겠다."

 

카스텔라를 둘러싼 주름잡힌 그 종이,

노릇하게 달라붙은 부스러기를 보면 그때 하신 어머님말씀이 생각난다. 자식들에게 양껏 먹이지 못하고 안쓰러워 하시던 아픈 기억 때문에 지금껏 카스텔라를 입에 대지 못했다. 그런데 손녀 덕에 다 늙은 이 나이에 뜻밖에 카스텔라 맛을 보게 된 것이다.
 
어렵게 살던 지난 날 이야기를 하면 항상 가슴이 답답하다. 보통 말을 해버리면 어지간한 일들은 속이 시원한데 이건 어찌된 건지 속을 다 드러내놓고도 시원치가 않다. 아마 지나간 날들이 생각도 하기 싫은 너무 춥고 어두운 날들이라 그런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