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웃으며 할 수 있는 이야기

『 갓바위 부처님 』

일흔너머 2008. 7. 25. 09:39

 

 지난여름 어느 날 오후라고 기억된다.
울적한 마음의 한 구석을 털어 버리려는 기분으로 나무가 우거져 그늘이 좋은 파계사 작은 암자로 집사람과 함께 올랐다. 오솔길을 따라 걸으며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이런 저런 집안의 일도 의논도 하고, 아이들이 따라오지 않았으니 둘만의 이야기에 크게 고된 줄 모르고 산행을 할 수 있었다. 우리는 이런 일이 자주 있는 편이다.

 

암자에 올라 법당 관음보살님께 절하고 나와서는 항상 하듯 시원한 샘물을 한잔씩 나누고 산바람에 얼굴을 내밀어 땀을 식히며 암자에서 기르는 개(犬)를 구경하고 있었다. 커다란 진돗개 세 마리였다. 옛날에는 절이 개소리가 들리지 않는 산 속에 있어야 한다고 하지만, 요즈음은 스님들이 직접 개를 키우는 경우가 많다.

 

은해사 백흥암의 진돗개는 파일날 찾아온 신도들을 보고 막 짖어대어서 어린애들이 겁에 질린 적도 있었다.

산 속에서 살아가는 비구니스님들에게는 호신용으로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이다. 문제는 개가 아니었다.


"스님 저 왔습니다!."
얼굴을 퍽 잘 가꾸고 다듬어서 나이를 짐작하기 힘들 정도로 부유해 보이는 보살님이 하이힐을 벗어들고 맨발로 법당앞 마당을 가로질러 스님처소 쪽으로 걸어가며 애교가 뚝뚝 뜯는 나긋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행동이, 목소리가, 태도가……, 모두가 절에서 가져야 하는 그런 경건함이 없어서 거슬리었다. 정확히 말하면 내게 아니 내 마음에 못마땅했다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이다.


"절에 오면 법당에 들려 먼저 부처님께 인사하지 스님은 왜 찾아?"
하고 그 여자신도가 들으란 듯이 혼자 중얼대자 집사람이 옆구리를 꾹 지르며,
"여보, 스님께 저 정도의 말투를 하려면 적어도 기백 아니 기천만은 들었을 겁니다."
귓속말을 하는 집사람의 태도로 보아 무척 역겹게 느껴진 모양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집사람은 절에 자주 나가고, 또 금전관계로 절에서 거드름을 피우는 꼴들을 보기 싫어서 절을 바꾸어 나가기도 했으니까 충분히 이해가 간다.

 

둘은 서둘러 내려오면서 자연 화제가 시주, 불사 등에 대한 문제를 이야기했다. 결론은 바로 과거의 십시일반(十匙一飯)이란 개념이 깨어지고 어떤 불사를 혼자서 해내는데 있다고 생각했다. 만약 절에 어떤 불사가 있다고 하면 금전적인 문제는 여러 사람이 나누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 쉽게 '내가 맡아 하겠소.'하면 스님은 여러 사람의 공덕을 일일이 빌리는 수고도 필요도 없고, 또 요즈음 어지간한 부자들은 그럴 경제력을 가지고 있으니까 신도 입장에서는 된통 큰소리도 치고 공덕을 쌓는다는 이름으로 나름대로 우쭐대기도 할 겸, 쉽게 승낙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그렇게 쉽지가 않다.

한 사람이 혼자서 불사를 하면 스님은 그 한 사람한테 모든 부탁을 해야 하고 결국 그 신도에게 얽매이게 되는 현상이 생기는 것이다. 또 다른 불사가 생기면 자연 그 신도의 얼굴이 떠오를게 뻔한 이치고 그러다 보면 평소에도 다른 신도에게는 소홀할 수밖에 없다.

 

마침내 그 신도는 내가 없으면 이 절이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고 아만에 빠져 스님을 쉽게 보며 부처님이 가르친 빈자(貧者)의 일등(一燈)을 무시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마음상하고 고깝게 생각하는 신자들은 말없이 다니던 절을 떠나는 것이다.

 

어느 날인가.
이 절 저 절에서 상처받은 신자들이 어렵잖게 모이기 시작한 곳,
오느냐 가느냐 묻지도 않고 자기의 공덕을 자기 스스로 쌓는 곳,
대구 팔공산 꼭대기에 자리한 선본사 암자에는 유명한 갓바위 약사여래부처님이 미소지으며 앉아있다.

 

내가 대학 다닐 때만 해도 이름도 없었는데 이제는 얼마나 유명한지 저 멀리 부산, 울산의 신자들이 정기 노선 버스로 와서는 밤낮 없이 밀려서 올라가고 밀려서 내려온다.
큰스님들의 훌륭한 설법을 들으려고 그렇게 많은 신도들이 올라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마음이 편한 까닭이다. 혼자 왔다가 혼자 기도하고 그리고 부처님의 가피를 안고 혼자 내려가는 것이다.


미소를 품고 조용히 내려다보는 갓바위 부처님은 그렇게 많은 신자들이 찾아오는 것도 아랑곳없이 말이 없다.

그냥 누구 간섭 없이 자기스스로를 닦고 다스려 편하게 내려가라는 듯 말이다.


그날은 울적한 마음을 털어 버리려고 올라왔는데 오히려 큰 돌덩이 하나 둘러메고 오는 기분이 드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