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

『 대륙의 겨울바람(상해-장가계-소주-항주 』 - (2)

일흔너머 2008. 4. 9. 15:38

<장가계(張家系)>

 <장량의 묘가 있었다는 자리를 표시한 표석 앞에서>


장가계-장씨들이 많이 모여 산다고 장가(張家)계란다.

그 장씨란 초한지(楚漢誌)에 나오는 장량(張良)의 후손이란다.

장량은 젊은 시절 천하를 통일하여 백성들을 편히 살게 하겠다는 꿈을 가지고 살았다. 어느 날 길을 가다가 한 노인을 만났다. 그런데 그 노인은 자신의 몸을 지탱하지 못할 정도로 허약해서 다리를 건너는 도중에 세 번이나 신발이 벗겨져 버린다. 이때 조금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고 신발을 주어다 신겨주는 것을 보고 노인은 천서(天書)를 주면서 열심히 공부하여 천하를 통일하라는 말을 남기고 떠난다. 이때 장량은 엎드려 스승의 이름 석자를 물었는데 노인은,
"천하 통일을 이룬 후 길을 가다가 누런 돌을 보거든 그것이 난 줄 알아라."
하였다고 해서 그 노인을 황석공(黃石公)이라 한다.

 

결국 장량이 유방을 도와 천하를 통일한 뒤 한신(韓信)이 죽는 것(兎 死狗烹)을 보자 다음 차례는 자신일 것을 눈치채고 도피해 이곳에 숨어살았단다. 물론 유방의 손길을 피해 이곳에 오던 도중에 누런 돌을 보고 거기에 황석공을 모시는 사당, 황석채를 지었단다. 과연 천하를 등지고 숨어 살 정도의 오지였다.
처음 원가계(袁家系-원가들이 많이 산다는데 장가계의 일부임)의 경치를 보았을 때, 그리고 326m 높이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을 때의 그 무시무시한 감동, 현장에서 보지 못한 사람은 아무도 짐작할 수 없다.


설악산 천불동 계곡을 집사람과 비를 맞으며 내려온 적이 있었다. 경치에 얼마나 빠져버렸는지 나는 아내에게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설악을 수십 번 다녔지만 이렇게 내설악의 천불동을 보고서야 겨우 설악의 진면목을 보는구나. 금강산이 아름답다고 해도 여기보다 더 아름다울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것은 견문이 짧은 소치였다. 내금강, 외금강, 해금강. 여북 해서 삼일포인가? 하루만 보고 간다고 했던 임금님이 얼마나 아름다운 경치였으면 삼일을 머물게 되었다지 않은가. 금강산은 역시 금강이었다. 설악산처럼 그저 한 부분이 아름답다는 것이 아니라 금강산은 눈 돌리는 모든 곳이 아름다웠다. 그런데 이 장가계는 그 금강산과 또 다른 자연의 중후함을 우리들에게 보여주었다.

 <눈이 약간 덮힌 장가계의 계곡을 내려다 보면 동양화 한폭을 보는 것 같다>


장가계를 처음 대하는 대부분 사람들은 그저 감탄사를 '와, 와' 연발할 뿐 경치를 침착하게 하나하나 감상할 수조차 없었다. 마치 가시에 찔린 손을 들고 아프다고 호들갑을 떠는 것이 아니라 커다란 망치에 얻어맞고 신음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거저 뒹구는 것 같은 우렁찬 감동이었다. 오밀조밀 아름다운 경치가 아니라 밀려드는 웅장함에 입을 벌리고 바라만 보는 그런 경치 말이다. 그리고 한참을 지나서야 제정신을 차리고 서로 이것 보라고 저것을 보라고 난리를 치는 것이었다. 밀려드는 감동에 빠졌다가 정신을 차려 자신이 장가계 속에 있다는 것을 의식했을 때는 '대단타. 대단타.'하고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는 비명만 지르고 돌아다니는 것이었다.

 

그리고 하루가 지나서야 우리는 자연의 위대한 조화 속에서 받은 충격을 벗어나 옆지기들과 이런저런 농담을 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장가계의 경치가 아름답다거나 빼어나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감히 평할 수도 없거니와 경치란 보는 사람마다 느끼는 바가 다르고 가지는 정서가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들은 경치가 주는 감동으로 해지는 줄도 모르고 있다가 어스름이 내려서야 겨우 호텔로 돌아와 저녁을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