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에 위(魏)나라 사마의와 촉의 제갈공명이 오장원(五丈原)에서 싸울 때 이야기다. 요즘 같으면 한창이랄 쉰 네 살, 중년에 공명은 승상의 무거운 직책을 두고 천수를 다한다. 이 세상을 떠나면서도 뒷일이 걱정된 나머지 마대를 불러 위연이 반역을 꾀할 때 행동을 같이 하라고 계책을 세우고 양의(楊儀)에게는 비책을 비단주머니에 넣어 준다.
거기에는 「위연과 대적하는 마상에서 읽어 보라.」고 적힌 봉투가 있었다. 그리고 공명이 우려하던 반란은 일어나고 아무도 용맹한 위연을 감당할 수가 없자 양의는 공명의 그 비책을 쓴다. 군사가 서로 대치한 가운데서 위연에게 '나를 죽일 자 누구냐?'라고 크게 세 번을 외치면 한(漢)나라를 통째로 줄 것이라고 하자, 위연은 가소롭다는 듯 껄껄 비웃으며 만 번이라도 외치겠다고 고함을 지른다. 위연이 채 한번도 고함치기 전에 마상에서 목이 떨어지고 만다.
그것은 바로 고함을 칠 때 다른 곳에 주의를 하지 못하는 바 옆에 있던 마대가 그 순간을 이용하여 칼을 휘둘러 목을 벤 것이다. 위연같이 용맹스런 장수도 한칼에 죽일 수 있었던 것은 큰소리로 떠들 때는 스스로 주의가 흐트러지기 때문이다. 공명은 이것을 이용한 것이다.
이야기가 길어졌지만 요즘 아이들은 너무 크게 고함을 지른다. 스스로를 지키지 못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귀기울일 줄 모른다는 이야기다. 운동경기장의 웅장한 응원소리에 길들여진 탓인지 아니면 노래에 취해 이어폰이 청력을 손상한 탓인지는 몰라도 교실이나 실내에서도 마구잡이로 고함치고 떠든다. 고함을 지르고 떠든다는 것은 결국 다른 사람의 이야기는 들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학문의 약점은 오만(傲慢)에 있다.
좀 더 많이 아는 학자일수록 더 기고만장하고 타인을 깔보는 성향이 있다. 그래서 옛날부터 이 점을 경계하는 많은 경구(警句)가 있다. 자기를 낮추고 겸손하라는 것이다. 열을 알되 하나를 얻은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하나를 알고도 세상을 얻은 것처럼 뽐내는 사람이 있다. 이미 세상의 시류는 후자가 판을 치고 있다.
목소리 큰 사람이 최고이고 촛불을 들고 팔이라도 흔드는 집단이라야 알아준다.
스스로를 지키는 조용한 겸손은 무시당하고 우리들 주위에서 사라진지 오래다.
이것이 지금 우리 사회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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