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을 가르친다는 것은 자신이 그것을 배우는 것보다 더 어렵다.
몇 년 전의 일이다.
우리 아이들이 어렸을 때 장기를 가르쳐 보았다. 장군과 말이 어떻게 나아가는가를 알려주고 공격은 이렇게 방어는 저렇게 하라고 하나 하나 가르치고 난 후, 둘째 계집아이와 셋째 사내아이의 대국을 훈수 없이 그냥 지켜보고 있었다.
둘째와 셋째는 연년생이라 평소 생각의 차이를 별로 느끼지 못할 정도로 정신적 발달이 비슷하였는데 막상 장기를 두는 것을 보니 전혀 달랐다. 둘째는 한말을 가지고 죽을 때까지 쓰다가 결국 죽으면 다른 말을 또 죽을 때까지 이용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셋째는 차(車)도 쓰고 말(馬)도 움직이고 상(象)도 이용하여 복합적인 공격을 하는 것이었다. 혼자 속으로 이것을 개인차라고 하는 것이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개인차(個人差 : Individuality )라는 것은 가르치고 배우는 교육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그러니까 배우는 학생의 입장에서 개인차에 해당하는 원인으로는 성(性), 나이, 체격과 체력, 지능, 집중력, 성장과정에서의 경험 등 많은 요인이 작용한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쯤 아이들에게 화투를 가르쳐 보았다.
한마디로 어려웠다.
이것은 솔이고 저것은 난초이고 또 이것은 알짜고 이것은 쭉정이고 하며 아이들에게 열심히 설명해 봤지만 그들은 왜 그것이 그런지를 의아해하며 알려하지 않았다. 결국 마음만 급했던 나는 아이들과 수준의 차이 때문에 가르칠 수 없다고만 하고 포기하였다.
그리고 며칠 후, 큰집에서 할머니와 아이들이 화투놀이를 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내가 그렇게 가르쳐도 안 되던 것을 지금 저희들 할머니와 함께 재미난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두 아이는 경험 많고 인내심과 사랑으로 가득한 노인으로부터 아주 쉽고 재미난 방법으로 화투놀이를 배우고 있었던 것이다.
화투를 잘 치는 사람도 자기가 처음 배우던 때를 이미 잊었을 것이다. 그러나 경험 많은 노인은 화투를 모두 덮어놓고 차례로 한 장씩 뒤집어 그림만 같으면 맞추어 가져가는 아주 단순한 게임부터 시작하였다. 그리고 차츰 익숙해지면 알짜와 쭉정이를 가려내는 복잡한 작업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마치 존듀이의 경험철학을 연구나 한 듯이 교육의 단계를 체험으로 알고 계신 것 같았다.
어머니는 손자들을 앉히고 『어떠한 어려운 교육과정이라도 교육방법만 적절하면 어떠한 학습자에게도 가르칠 수 있다.』는교육학자 존듀이의 말을 실천으로 보여 주었던 것이다.
사범대학을 나와 몇 십 년 학교에 있었다는 나는 속으로
「그래, 가르친다는 것은 사랑과 인내의 실천이다.」
라며 부끄러움에 머리를 긁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커서 뭐 될래? 』 (0) | 2008.07.30 |
---|---|
『 화투 』- (2) (0) | 2008.07.23 |
『 틈새 시장 』 (0) | 2008.07.18 |
『 개미 』 (0) | 2008.07.15 |
『 지도자의 독선 』 (0) | 2008.07.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