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콩, 사랑의 거리에는 영화 촬영하는 것 같이 조각으로 두 사람을 세우고 가운데에 자리를 마련하여...]
한창 감수성 예민한 중학교 때 영화 '콰이강의 다리(The Bridge on The River Kwai)'를 보았다.
처음 보는 열대의 풍광과 일본군 그리고 연합군의 미묘한 인간 관계에 빠졌지만 그보다 나에게 더 다가온 것은 단체를 이끄는 지도자의 자세였다.
나는 그때 느꼈다.
그리고 저 영국군 장교(니콜슨 대령)처럼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물론 그가 주인공이고 영웅적으로 돋보이게 각색되었겠지만 일본군 포로 수용소장과는 판이하게 다른 지도력을 보여주었던 것이 내 마음을 끈 이유였다. 포로수용소장 사이토는 독선적이고 목표를 향해 오직 밀어붙이는 그런 형이었다. 그러나 니콜슨 대령은 함께 하는 참모들의 의견을 하나하나 물어 그 장점만 취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다리를 건설하는 위치를 사이토는 자기가 지적하는 곳이 곧 다리의 위치가 되었지만 니콜슨 대령은 지질학을 전공한 장교를 불러 어디가 적당한 위치인가를 물어 거리는 좀 멀어도 지반이 탄탄한 곳으로 옮기는 것이었다.
나는 군에서 대대의 정보장교를 한 적이 있다.
혼자 속으로 니콜슨 대령을 생각하며 참모로서 사병들을 민주적으로 통솔하려고 힘썼다. 그러나 내 주위는 모순 투성이고 일본군 사이토보다 더한 사람이 많았다.
아침에 대대장이 출근을 하면 참모회의라는 것을 하였다.
말이 회의지 일방적인 대대장의 하루 일과를 지시하는 모임이었다. 그러다가 정말 가물에 콩 나듯 한번 정도는 질문이라는 걸 한다. 그러면 그것도 모르느냐는 식으로 그 질문한 사람은 바보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 아무도 말을 하지 않고 오직 대대장만 이야기하는 회의인 것이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다.
교직원회의라고 하지만 교무부장이 일주일 행사 일정을 발표하고 연구부장하고 그리고 학생부장…… 이렇게 이야기하면 끝나는데 거기다가 구색을 갖추기 위해 주감선생님도 한마디하라고 한다. 한 주일 동안 학생지도를 어떻게 할 것인가 또 주감 활동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의논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주훈이란 것을 발표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주훈이란 것이 학생과에서 일년 치를 미리 계획하여 짜 놓은 것이라서 일어나서 또박또박 읽기만 하는 것이다. 괜히 예전부터 하던 짓이라 계속 그 짓을 하며 절차를 밟는 그런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주감이 되어 주훈을 발표하라면 벌떡 일어나 미리 교무실 칠판에 써둔 것을 가리키며,
「금주 주훈은 동쪽 칠판을 참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하고 멋쩍은 듯 앉아버렸다.
물론 다른 선생님들이 한바탕 웃고 교장, 교감 선생님은 의아해 하고…….
결국 내가 그런 짓을 한지 얼마가지 않아서 교무회의에서 주감선생님이 주훈을 발표하는 절차는 슬그머니 빠지더니 없어져 버렸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어떤 사람은 뭐 그런 회의가 있는가 하겠지만 실제로 겪어본 사람은 아직도 우리 나라에는 회의라는 이름을 달고 지시사항을 전달하는 그런 곳이 많다는 걸 통감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긴 텔레비전에 나오는 대통령과의 대화라는 것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대화는 무슨 대화, 일방적으로 이야기하는 경우가 아니면 구색을 갖춰 들러리들을 앉혀놓고 국민과의 대화라는 허울좋은 이름을 달고 혼자 연설하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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