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친일 인명사전-춘원의 돌 베개 』

일흔너머 2009. 12. 1. 13:08

 

 

대통령하면 박정희, 박정희하면 대통령 아닌가.

대통령선거도 했지만 결과는 뻔했고 십 팔 년이나 지속되었으니 나는 박정희 독재정권이 끝없이 지속되는 줄 알았다. 십여 년이 그런데 하물며 삼십 육 년이란 긴 세월 동안 일본이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강점하고 있었으니 아무리 혜안을 지닌 사람이라도 우리나라가 독립할 것이란 것은 몰랐을 것이다.

 

구 한말 문인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가인 춘원(春園) 이광수도 그랬다. 평북 정주에서 태어나 일본 명치학원 중학부, 와세다 대학을 다닌 당시 최고의 엘리트다. 매일신보에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적 장편 무정을 발표하였다.

 

그는 온갖 악조건 속에서 독립운동에 전념하는 독립투사들의 눈물겨운 모습을 목격하고 3.1독립만세 운동의 기초가 되는 「2.8 독립선언서」를 초안하였다. 하지만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우리의 독립군을 보고 속사정이 너무나 열악하여 조선이 근대화된 문명국가인 일본을 도저히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한다.

 

즉 '우리 민족의 독립은 현실적으로 가망이 없다.'고 단정짓는다. 아무리 현명한 사람이라도 삼십 육 년이란 세월이 누르는 식민의 의식, 거기다가 시골에서 농사나 짓는 무식한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우리 조선과 일본을 비교해 보면 희망이 없었던 것이다.

 

춘원은 상해 임시정부에서 독립신문을 펴내면서 도산 안창호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도산으로부터 받은 영향은 일생 동안 그의 이념노선과 충고를 따르고자 결심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독립신문을 그만두고 귀국하면서 도산과 결별, 자신의 길을 걷게된다.

 

결국 고통으로부터의 탈출, 친일적 길을 걷게 된다. 일본총독부의 정책에 적극 협조하였을 뿐 아니라 스스로 창씨개명, 일본식으로 '가야마미쓰오'라고 하였다. 또한 1944년 11월 대동아문학자대회에 참가하고 학병권유의 글과 대중연설을 번갈아 했다.

 

1945년 8월 15일 춘원은 친일파 처단이라는 불길한 소식과 함께 일본의 항복소식을 듣는다.

경기도 사능에서 피신을 권유하는 말을 듣고도 그대로 머무르며 '나의 고백', '돌 베개'라는 글을 썼는데 그 주된 내용은 '그 시대에 친일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느냐. 밥을 먹어도 일본의 쌀이요 공기를 마셔도 일본의 공기라'는 주장이었다.

 

그러니 다같이 고려 병자호란 때의 환향녀(還鄕女)처럼 힘없어 끌려갔던 사람을 손가락질만 하지말고 다함께 목욕하고 지난 날을 잊고 단합하자는 내용이다. 나는 민족을 위해 살았고 민족을 위해 죽는 이광수가 되기에 부끄럼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말처럼 부끄럽지 않기에는 그는 너무 멀리 와 있었다. 결국 반민특위에 체포 투옥되었다. 당시 최고의 지식인 중 한 사람 춘원조차 일본이 망하고 우리나라가 독립될 것이란 것을 몰랐다는 것은 그만큼 암담하고 식민시대가 길었다는 것이다.

 

이제 그 시대가 끝나 겨우 육십 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일본의 그 악랄함을 잊어가고 있다. 흔히 해방둥이라며 해방되던 해(1945년)에 태어난 사람을 일컬었다. 그 해방둥이가 육십이 넘어 노년이 되었으니 실제 식민시대를 살았고 일본의 악랄한 식민착취를 경험한 사람은 칠순이 넘어 대부분 역사 너머로 사라진 것이 현실이다.

 

만약 우리가 손을 놓으면 그 당시 잘 살았던 친일파들은 지금보다 더 당당하게 거짓을 지껄일 것이다. 하여 그 역사를 잊지 않고 위기에서 나라를 지키려는 충정을 키우려는 의도로 친일인명 사전을 집필한 것은 정말 쌍수를 들어 환영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