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창 밖으로 보이는 것은 모두가 사람이 살 수없는 황량한 자갈밭 뿐이었다...]
우루무치에서 시간은 북경시간을 사용한다. 북경 시간은 한국보다 한 시간이 늦다. 하지만 우루무치의 태양은 세시간 늦게 떠오르니 북경시간으로 여덟시가 되어 아침을 먹고 아홉시가 되어야 하루 일과가 시작되었다. 우리 한국시간으로 열시에 출근하는 것이다.
황사인지 아침 안개인지 모르지만 주위는 온통 뽀얗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아니 사람 사는 흔적도 찾을 수 없는 황량한 들판이다. 울퉁불퉁 말만 아스팔트포장 도로가 그 자갈밭 위에 똑바로 놓여있다. 그저 자로 잰 듯 말이다.
우리는 그 길을 최소 두어 시간, 길면 예닐곱 시간씩 달렸다. 그것도 시속 백 킬로가 넘는 속도로 울퉁불퉁한 길을 달린다. 마침 허리띠에 만보기(萬步器)를 차고 있었는데 저녁에 보면 만 칠천 보 정도를 걸은 것처럼 숫자가 올라가 있었다. 버스를 타고 흔들리는 것이 만보기에는 걸은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천지는 얼어있었고 멀리 천산은 만년설로 덮여 정말 이국적인 풍경이었다...]
그렇게 찾아간 곳이 「천산천지(天山天池)」였다.
천산산맥의 작은 봉우리에 있는 산정호수인 천지의 비경을 보러간 것이다. 아직 흰눈으로 덮인 산과 호수는 이국의 또 다른 정취를 느끼게 하였다. 중국에서 항상 느끼는 것은 우리가 자연보호를 그렇게 외치며 산에 케이블카를 설치하는 것을 반대하는데 그들은 그런 것을 당연시한다.
과연 어느 것이 옳은 처사인가? 중국 어지간히 이름난 산에는 모두 케이블카를 설치하고 또 구간마다 전동차를 운행한다. 공해가 없는 전기차 말이다. 우리는 산의 기슭까지 자가용이 들어가고 또 등산로가 너무 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까닭에 휴식년을 정해도 산하는 공해를 감당치 못하고 몸살을 앓는다.
[도로에도 양떼들이 마음대로 지나다녔다. 한가한 시골이다...!]
천산천지로 가는 길에는 위그르족들이 방목을 하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주로 양들이고 염소였다. 어쩌다 말과 당나귀들이 보였다. 소들은 우리나라의 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았다. 시내를 따라 몽고인들이 사는 이동식 가옥 게르가 있었는데 위그르족들은 게르나 파오라고 하지 않고 장펑, 짠팡 등으로 불렀다. 이동하기 쉽게 틀은 나무로 만들고 위에 천을 씌운 것이다.
점심을 먹고 '신강위그르'박물관에 들렀다.
건조한 사막에서 발견된 미이라가 전시실의 주를 이루었다. 처음 대하는 미라인지라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특히 3200여년 전의 「누란 미녀」라는 미이라는 눈과 입을 제외하면 아직까지 여자로서의 얼굴과 몸매가 그대로 있었다. 그 옛날의 의상과 신발, 그리고 머리카락까지… 보는 사람의 마음을 숙연하게 만들었다.
죽으면 깨끗이 사라져야한다. 저렇게 뭇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어 앞으로 얼마나 누워있어야 하는가? 살아서 어떤 영광을 누렸는가는 몰라도 저 여인의 팔자가 안타깝기까지 하다. 사막의 특이한 건조기후는 이렇게 모든 생명체를 썩지도 못하게 북어처럼 말려버리는 것이다.
[정말 대단한 건물과 상점들이었다. 위그르족들은 우리가 모르는 물건들을 사라며 내놓고...]
야간 열차를 타야하기 때문에 돌아오는 길에 시간을 맞추기 위하여 「국제대바자르」에 갔다. '바자르'란 시장이란 말로 카자흐 족의 거대한 국제 시장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각자의 취향대로 시장을 둘러보고 물건도 사고 사진도 찍었다. 이슬람교도들이 흔히 차고 다니는 아름답게 치장한 작은 단도부터 여인들이 머리에 두르는 스카프까지 많이 구경할 수 있었다.
특히 위그르 족 여인의 고혹적인 눈매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냥 있어도 온갖 화장을 한 우리나라의 최고 배우보다 더 아름다운 눈과 눈썹, 똑바로 쳐다보기가 어려웠다. 거기다가 어린이는 더 귀여워 손녀처럼 한번 안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가이드는 그것을 조심하라고 미리 일러주었다. 그들의 관습에는 낯선 사람이 어린이를 안아주는 것이 바로 추행이라는 것이었다.
시장을 한참 둘러보고 우리는 기차를 타러 이른 저녁을 먹고 우루무치 역으로 갔다. 한참을 기다려 열차를 탔는데 이때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고난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하룻밤 자고 나면 될 것이라 작정했지만 정말 열악한 환경에서 천 이백 킬로미터를 달려가야 했다. 자다가 화장실에 가면 꼭 두어 사람이 줄을 서 기다리는 것이었다.
이불은 온갖 냄새가 베어있어 차마 덮을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겨우 다리만 덮다가 차츰 추워오니 배까지 올라가다가 나중에는 목을 지나 얼굴까지 덮지 않을 수 없었다. 중국사람들의 담배는 정말 나에게 큰 공해였다. 복도나 침실이나 아무데서나 피워대는데 밤새도록 기침을 했다. 그리고 기차는 안마라도 하듯 내 몸 구석구석을 두드렸다. 처음에는 웃음이 나왔지만 피곤한 몸을 이기지 못하고 한숨 자고 나니 대륙의 한 가장자리를 이렇게 달리는구나 싶어서 그 묘한 체험을 한다는 생각에 어두운 차창 밖을 기웃거리게 되었다. 그렇게 악몽 같은 밤은 지나고 [유원]역에 도착하였다.
아침 여덟시. 우리는 유원역에서 짐을 내리고 새 가이드를 만나 아침을 먹으러 갔다. 가뜩이나 입맛이 없는데 식사는 엉망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중국인들은 아침을 잘 차려먹지 않는단다. 그저 우리들이 흔히 말하는 쌀미음 한 사발정도로 아침을 대신한다고 했다. 모두들 화장실을 찾는다. 열차에서 볼일을 보지 못한 까닭이다.
[저 멀리 사막을 향해 시원스레 볼일들을 보는 통쾌, 유쾌, 상쾌.....! ]
그러나 가이드는 참으라고 하더니 버스는 둔황(敦煌)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여자들에게 우산을 가져왔느냐고 물었다. 한 방울의 비도 오지 않는 사막에서 우산이 뭐 필요한가 하고 묻는 우리들을 아무도 없는 황량한 사막, 그 너른 자갈밭이 모두 화장실이라고 내려놓았다. 우산이 왜 필요한가 그 이유를 알았다. 이때부터 우리는 중국식 사막화장실을 마음껏 이용하였다. 처음에는 여자들이 부끄러워했지만 그곳이 중국이고 대여섯 시간을 가도 화장실이 없는데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웃기는 것은 인간의 적응력이다.
여행을 마칠 때쯤에는 얼마 가지도 않고 대수롭잖게 웃으며 볼일을 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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