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고굴에는 아직 봄이 오지 않았다...주로 은사시나무(음백양)들이 둘러져 있었는데 황량한 겨울의 그림자가...]
세상이 어수선하다.
물론 우리가 모르고 지나서 그렇지 하루에도 얼마나 많은 사건과 사고가 일어나겠는가? 인천 공항을 떠날 때 전화를 로밍하여 갔더니 며느리가 문자를 보냈다. 지진이 일어났는데 괜찮으냐는 것이다. 우리도 모르는 지진이 밤새 일어난 것이다. 말도 모르면서 TV뉴스를 보니 자꾸 지진현장이 나와서 아마 지난 사천 지진을 아직도 방영하고 있구나하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라 밤새 '청해'에서 지진이 일어났단다.
청해는 신장위그르(신장웨이우얼)자치구(新疆維吾爾自治區)와 경계를 함께하고 있는데 그 거리가 천 이백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다. 그러니 지진과는 아무 상관하지 말라는 가이드의 설명이다. 신장자치구가 우리나라의 남북한을 합친 면적의 6배란 사실을 여기 와서 알았다. 거기다가 아무 쓸모 없이 넓기 만한 땅이라고 보이지만 지하에 엄청난 양의 석유와 구리 같은 지하 자원이 묻혀있는 곳이다.
[우리가 지나가는 길에는 석유를 퍼 올리는 펌프가 계속 가동 되고 있었다...]
어쨌거나 하늘이 아무 소용없는 땅을 둘 리가 있겠는가? 멀리 시추 펌프가 흩어져 있는 걸 바라보며 무척 부러워들 했다. 하지만 나는 생각이 다르다. 지키지 못할 보물은 차라리 없는 것이 낫다. 만약 우리나라에 석유가 나왔다면 우리는 지금처럼 행복하게 살지 못 할지도 모른다. 그 석유를 탐내는 어느 강대국에게 짓밟혔을 것이다. 이라크처럼.
내가 이번 여행에서 가장 보고 싶은 곳은 둔황(敦煌)의 막고굴(莫高窟)이다.
'막고'라는 이름은 마을이름이라 하기도 하고 둔황에 있는 산이름이라고도 하는데 그 의미가 '끝'이라 사막의 끝이란 의미가 가장 타당할 것 같았다.
둔황은 감숙성-간쑤성(甘肅省) 서부의 도시이며 실크로드의 요지다. 그렇다고 우루무치처럼 그렇게 큰 도시는 아니다. 우리나라의 경주 정도로 인구 이십여 만 명이며 우리가 찾아가는 유적지나 호텔 식당이 거의 5분 거리에 있었다.
실크로드가 처음 열린 것은 전한(前漢), 그러니까 한 무제(武帝) 때이다.
한 무제는 북방 변경지대를 위협하는 흉노를 제압하고 그때 당시 서역이라 불리던 서아시아로 통하는 길을 얻기 위해 장건(張騫)을 파견했다. 장건은 13년이란 세월을 파란만장하게 보내며 이 서역의 문물을 알리는 역할을 하게 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둔황을 세상에 알린 사람은 도사 왕원록이다. 1900년경 세상을 떠돌던 도사 왕원록은 둔황의 막고굴에서 생활하게 된다. 그리고 우연히 장경굴에서 방대한 양의 고문서를 발견한다. 오랜 세월, 굴속에 봉인되었던 고문서들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 문서들을 지키지 못했다. 우리나라의 내규장각 도서가 프랑스의 루불박물관에 있듯 둔황의 장서는 프랑스의 폴리오, 영국의 스타인에 의해 욕심껏 훔쳐져 자기들 나라로 가져가 버린 것이다. 그림과 조각은 미국으로 갔단다.
정글의 야수들이 먼저 본 순서대로 좋은 걸 뺏아 먹듯이 훔쳐간 것이다. 그 중 일부가 일본인 오타니에 의해 일본으로 훔쳐 가는 도중에 전쟁이 끝나고 우연찮게 우리나라에 남게 되었단다. 가이드 말로는 한국도 그 오타니의 물건을 돌려주지 않는다고 했다.
인간사가 야수들과 다를 바가 없다.
둔황의 막고굴을 보면 기가 막히는 힘의 역사를 보는 것 같다.
힘이 없으면 석유가 문젠가, 조상이 물려준 유산도 지키지 못하는 것이 바로 현실이고 그 보물 때문에 나라와 국민들의 목숨까지 잃게 되는 것을.
둔황의 막고굴에서는 특별히 정해진 현지 가이드가 나왔다. 그리고 서툰 한국말로 사진을 찍지 못하게 했다. 하긴 억지로 찍지 말라고 하지 않아도 뭐 특별히 찍을 것도 없다는 걸 다 돌아보고 난 다음에야 알았다. 도둑이 수 차례나 지나간 자리에는 우리가 감탄할 만한 문화재가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명사산 관광지에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붐볐다...!]
막고굴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명사산(鳴砂山)이 있다.
'명사(鳴砂)'란 울 명(鳴)자, 모래 사(砂)자, 말대로 모래가 바람에 굴러다니면서 내는 소리가 마치 현악기가 우는 것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우리는 모래썰매를 타기 위해 낙타를 타고 한참을 갔다. 낙타는 보기보다 눈이 선하게 생겼다. 촉촉하게 젖은 까만 눈에 긴 눈썹은 저 멀리 펼쳐진 사막을 향한 노스탤지어, 하지만 짐승 특유의 지린내가 코를 찔렀다. 처음 일어날 때와 주저앉을 때는 떨어질 것 같아 조심하지 않으면 위험했다.
우리는 한참 걸어서 썰매를 탈 수 있는 곳까지 모래 언덕을 올라갔다. 현지 중국인이 바닥을 대나무로 만든 모래 썰매를 지고 올라와 우리에게 내려놓았다. 언덕이 가팔라 한 몸 올라가는데도 힘이 드는데 썰매를 지고 끙끙거리며 올라오는 중국인을 보면 돈 좋다는 것을 느낀다.
그들이 힘들여 지고 온 썰매를 우리는 그저 웃으며 타면 되는 것이다. 우리는 돈을 냈으니 말이다. 세월이 거꾸로 흘러 저 중국인이 한국에 왔을 때 우리의 아들딸이 그들을 위해 썰매를 지고 산을 오르지나 않을까 걱정을 해 본다.
썰매를 타는 것은 위험하지도 않았고 재미가 있었다. 하지만 한번 신나게 내려오는 걸로 만족해야 했다. 다들 육십이 넘는 나이에 용기가 대단했다. 처음에는 조심조심하더니 나중에는 고함을 지르며 신나게 내려왔다. 주위는 온통 누런 모래로 내려다보는 정경이 대단히 아름다웠다.
[관광객들은 이 월아천 주위를 한바퀴 돌아보는 걸로 관광이 끝났다...정말 아쉬운 시간이었다.]
썰매를 타던 곳에서 백여 미터를 걸어가니 그 유명한 '월아천(月牙泉)'-초생달 모양의 오아시스가 있었다.
누가 여기다 저런 예쁜 누각을 지을 생각을 했을까? 예쁜 여인이 사막 한가운데 서서 살짝 웃고 있는 듯 정말 잘 어울리는 건축물과 자연의 조화였다. 아내와 나는 손을 잡고 서서 햇빛이 따가운 줄도 모르고 멍하니 월아천의 누각을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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