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

『산동성 기행-제나라 역사 박물관』

일흔너머 2008. 4. 6. 13:41

 

이번 여행에서 처음 찾아간 곳은 춘추전국시대 전국칠웅(戰國七雄)의 하나인 제(齊)나라의 역사 박물관이다.

춘추시대의 시초는 BC 770년 주(周)왕조가 낙양[洛陽]으로 천도한 후부터 BC 221년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의 통일로 전국시대는 끝이 난다.

 

조그만 시골의 구석에 아담하게 현대식으로 지어진 건물이었고 현판은 제국역사박물관(齊國歷史博物館)이라고 간자로 씌어져 있었다.
한문 깨나 읽는다는 나도 간자로 되어 있으니 한참씩 생각하고 들여다봐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아마 이것이 간자의 효용성문제가 아닌가한다. 사용하기 수월 하라고 만든 간자가 오히려 또 하나의 글자인 간자를 알아야하도록 되었으니 이중의 노력을 요구하는 결과인 셈이다. 길 한번 잘못 들면 아무리 돌아도 바른길(正道)을 찾지 못하는 결과와 같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한글이란 크나큰 복을 타고난 것이다.

 

버스로 박물관을 찾아가는 도중에 갑자기 길이 없어졌다. 버스 운전사도 당황하고 우리 모두 의아해 했다. 그러나 안내를 하는 안씨는 태연히 웃으며,
"중국에서는 이런 경우가 많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란다.
어제까지 멀쩡하던 도로를 예고도 없이 오늘 파헤쳐 공사를 한단다. 그리고 공사가 끝나면 서너 달 후에 다시 파고 공사를 한단다. 그래야 인부들이 일자리를 얻고 먹고 살수 있다는 설명이다. 어떻게 이해를 해야할지 또 우리 나라도 자주 파헤치는데 이런 이유인지 한참동안 헷갈렸다. 과연 안씨 말대로 버스 운전사는 지나가는 현지인을 붙들고 길을 물어 찾아가기는 했지만 이국(異國)의 정서를 이해하는데 상식적으로는 되지 않았다.

 

제나라 역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환공과 관중 그리고 포숙아 이야기다. 우리의 가이드인 안씨는 이들의 관계를 더운 날씨에 땀을 뻘뻘 흘리며 얘기했지만 오히려 더위에 지친 우리들은 시큰둥했었다.

어린 시절부터 평생 변함이 없었던 관중과 포숙아(鮑叔牙)와의 깊은 우정을 '관포지교(管鮑之交)'라 하여 유명하다. 관중은 환공(桓公)이 즉위할 무렵 환공의 이복동생인 규(糾)의 편에 섰다가 패전하여 노(魯)나라로 망명하였다. 그러나 포숙아의 진언(進言)으로 환공에게 기용되어, 국정(國政)에 참여하게 되고 환공을 도와 제나라를 부국강병으로 만든다. 그러나 환공은 만년에 관중의 유언을 무시하고 전에 추방한 신하를 재등용하여 그들에게 권력을 빼앗긴다.

 

관중과 포숙아의 이야기는 워낙 많이 알려진 이야기니까 관심이 적었지만 조그만 마을에 박물관을 짓고 유물도 별로 없었으나 환공과 관중, 그리고 포숙아의 흉상을 만들어 세우고 토기를 다듬어 볼거리를 정렬해 놓고 관광객을 부르는 그들의 의도는 감탄 할만 했다.(관람료에서 내국인과 외국인은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보통 외국인은 일여덟 배는 내어야했다.)

 

우리 나라에도 지방에 이런 박물관을 가진 곳이 있는데 경남 거창의 박물관과 진주의 진주성내에 자연사박물관이 가 볼만하다 하겠다.
이번 여행에서 내가 관심을 가지고 본 박물관이 세 곳이었는데 그 중에 제일 큰 곳이 산동박물관이었다.
물론 많은 유물과 잘 정돈된 '산동박물관' 그리고 입장료는 다음에 소개하기로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