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 (2)

일흔너머 2008. 4. 13. 17:57

 

 
 박 선생은 원래 주량도 적은 데다가 더운 오후에 소주 두어 잔 들이키고는 피곤한 듯 영 맥을 추지 못한다.
"선생님은 한석봉 엄마가 진짜로 직업이 뭔 줄 압니까?"
이건 아무래도 박 선생을 너무 무시하는 것이다. 이때껏 말이 없던 박 선생은 자신도 모르게 내뱉었다.
"허허……"
기가 차는 듯 안씨 얼굴을 멀거니 들여다보더니 한참 뜸을 들이고 나서,
"이 사람 취했구먼, 떡장수잖아, 떡장수!"


과연 그랬는지 모르지만 국민학교에서 배운 교과서의 이야기가 그랬다.

그리고 한석봉을 본받아 열심히 공부하라는 교훈이 함께 들어있었던 걸로 안다. 물론 시간이 흐르고 대학에 가서야 석봉(石峯)은 호라는 것과 이름은 '한호(韓濩)'라는 것 그리고 또 다른 호로 청사(淸沙)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이고, 그러니까 선생님은 다른 사람들처럼 속아넘어간 겁니다. 떡장수가 떡 써는 것 봤습니까? 떡장수는 떡을 만들지 썰지는 않습니다. 떡국장사나 밥장사라 하면 몰라도……"
말인즉 맞는 말이다. 그래 떡국은 썰어서 만들지만 떡장수가 떡을 썰 일이야 없지. 하지만 이 친구 취했어. 옛 이야기라는 것이 모두 그런 것이지. 그저 이야기 줄거리만 맞으면 되는 걸 필연적인 요소라든가 합리적인 상황은 별로 신경을 쓸 일이 아니지.


"아마 모르긴 해도요 이렇게 유명한 명필이 후세에 친필은 드물게 남겼고 돌이나 비문에 새긴 글씨가 대부분입니다. 특히 다른 사람이 한석봉의 글씨체를 흉내내 엮은 모간(模刊)이 많은 이유는 글씨체 때문입니다. 이건 추사(秋史)의 열정이 깃들인 글씨와 비교하면 금방 압니다. 한 마디로 그의 가슴에는 삶의 뜨거운 열기가 사라지고 흥(興)이 없었다는 겁니다. 즐겁고 신나고 기쁜 것뿐만 아니라 심지어 괴롭고 슬픈 것까지 잃어버린 삭막하고 비정한 삶을 산 겁니다. 선생님은 저보고 꼭 본 것 같이 얘기한다고 놀리겠지만 안 봐도 그 정도는 짐작이 갑니다. 못 믿겠으면 그의 글씨체를 편한 맘으로 한 시간만 들여다보십시오. 사람이 쓴 글씨가 아니고 이건 활자로 찍어낸 듯 천편일률적으로 꼭 같습니다. 석봉이 어릴 때 가졌던 그 풍부한 감정은 이미 떡을 써는 엄마 칼에 다 잘려버렸다는 증겁니다."
"……"


미륵같이 앉아있는 박 선생을 앞에 두고 마치 염불하듯 안씨는 계속한다.
"그리고요, 불공정한 시합을 끝내고 엄마한테 쫓겨 가지고 그 길로 다시 절에 간 석봉이가 어떻게 지냈을까를 생각이나 해 봤습니까? 모르긴 해도 아마 다리 뻗고 자는 날은 없었을 겁니다. 이야기대로라면 어떻게 놀 수 있었겠습니까. 집에서 어머니가 자기를 위해 열심히 떡을 썬다고 생각하면 한시라도 그냥 맘 편히 쉬지는 못했을 겁니다. 암, 어찌 쉴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선생님요, 저는 석봉이의 그 맘을 안단 말입니다. 암 알고 말고요, 충분히 압니다……."
안씨는 '충분히'라는 곳에 침을 튀기며 특히 힘주어 말했다.

 
"제가 변호사 노릇 딱 부러지게 못하고 시답잖은 회사의 법률고문이랍시고 만족해 사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재판정에서 판사가 내려치는 망치소리만 들으면 기가 죽어서야 무슨 변호를 하겠습니까? 저도 당당하게 변호하고 망치로 땅땅 두드리는 판사도 하고……. 선생님 저도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말끝의 '싶습니다'는 겨우 들리는 둥 마는 둥하게 더듬더듬 뱉어내고는 팔을 창에다 기대더니 결국 얼굴을 묻고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취기 탓이다. 그렇게 강단 있던 안씨가 낮술에 취한 것이다. 평소 안씨 혼자 답답해하며 아무리 떠들어도 박 선생은 그저 바위에 대침 놓는 격으로 말이 없었다. 물론 박 선생은 안씨의 속을 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빙그레 웃거나 멀거니 쳐다보는 것으로 박 선생 할 일은 다였다. 과묵하고 속 깊은 박 선생은 듣기만 할 뿐 여간해서 대구를 않았다. 그저 안씨 혼자 질문과 답을 하며 떠들다 마는 날이 대부분이었다. 오늘은 취중에 화제가 어찌 안씨 자신의 신세 타령으로 옮아가고 말았다. 그리고는 구름이 모여 비를 뿌리듯 끝내 한바탕 울음을 토하고 만 것이다.


박 선생은 말 안 해도 안씨의 그 울음을 안다.

한석봉을 들추고 망치를 얘기할 때 이미 안씨의 속을 꿰뚫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박 선생은 안타깝게도 더욱 말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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