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 (4)

일흔너머 2008. 4. 16. 09:40

 

 
"……"
기가 막혔다.
어쩔 것인가?
무어라 위로의 말을 찾지도 못했지만 지난 일을 생각하면 안씨에게 그저 부끄럽고 미안할 따름이었다.


'어린 가슴에 못을 박다니……아, 내가 몹쓸 짓을 했구나.'
학기초가 되면 학생들과 정(情)들지 않았을 때, 영(令)을 세우지 못하면 한 해 동안 학급의 질서는 무너지고 만다.

때문에 박 선생은 담임을 맡으면 매번 신학기에 공부 잘하고 똑똑한 녀석을 제물로 골라 물 먹이는 방법을 써왔다.

다른 선생님으로부터 사랑을 흠뻑 받는 학생을 나무람으로써 그 어떤 경우도 저 선생님에게는 예외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안씨는 박 선생이 선정한 그 해의 인물이었다.


"오늘도 잊었단 말이지?"
"……"
"그런 정신으로 무슨 공부를 한단 말이야? 시험지대가 도대체 몇 푼이나 되는데, 나 같으면 친구에게 빌려서라도 내겠다. 벌써 며칠 째야!"
"……."
말없이 고개만 숙인 녀석에게 다른 학생들도 잘 들어두라는 투로 온갖 수모를 주었다.

 

그때 만약 안씨가 악을 쓰고 욕을 하며 대들었던지 젊은이의 패기로 반항만 했더라도 박 선생 마음이 지금보다는 덜 했을 것이다.
'못난 녀석 같으니라고……'
그때 안씨에게 한 짓을 생각하면 민망함에 화톳불을 뒤집어 쓴 듯 얼굴이 화끈거렸다.

박 선생은 혼자서 몇 번이나 곱씹으며 후회했는지 모른다.

 
그 일 이후, 차츰 말을 잃어버리고 멍하니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기만 하는 편으로 변해 갔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아무리 많아도 그저 말없이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니까 "……." 안에다가 모든 것을 구겨 넣고 혼자 끙끙대는 것이 박 선생의 습관으로 된 것이다. 악의가 아니었으니 자신의 속내를 알아달라고 빌면서 속절없이 기다리는 꼴이 되었다.

 

한바탕 울음 뒤, 감정을 추스른 안씨는 온다간다 인사도 없이 해거름 비탈길을 걸어 내려갔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사람처럼 뒤돌아보지 않고 휘적휘적 걸어가는 술 취한 안씨의 뒷모습을 박 선생은 애처로운 눈으로 그냥 지켜볼 뿐이었다. 오늘따라 박 선생은 하고 싶은 말이 왜 이리도 많은지 모르겠다.


'그래, 살다보면 내 마음이 네 가슴에 가 닿을 날도 있을 것이다.
달콤한 말보다 쓴 소리가 약이 되는 경우가 있고, 말로 떠벌리는 것보다 그저 바라보고만 있어도 오히려 좋을 때가 있는 거야. 말없이 함께 하는 많은 시간은 분위기 때문이야. 같은 분위기에서 보낸 시간이 역사(歷史)를 만들거든. 역사란 변화며 변화가 모여 안타까운 후회를 만들기도 하지. 잘못을 저지르고 이러면 좋았겠지 또 저렇게 했으면 어땠을까하고 돌이키지만 우리들 삶이란 돌아올 수 없는 일방통행이야. 다만, 살면서 넘지 못할 벽(壁)을 만나지 않은 것만도 다행으로 생각해야지. 사는 데 무슨 정답(正答)이 있나? 생각해 봐라, 지금 한잔 술을 마시고 후회한다고 그 옛날로 돌아갈 수는 없는 거야. 어제의 실수를 잊고 그냥 오늘을 살아가는 거야. 오늘 그저 살아있는 이 순간, 좋은 거잖아?…….'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박 선생은 습관처럼 <말 줄임표> 속에다 억지로 구겨 넣고, 정작 떠나가고 이젠 보이지도 않는 어둠을 향해 갑자기 생각난 듯 고함을 질렀다.
"나는 모른다 나는…….그래, 나는 그-냥 이렇게 사 안 - 다!"
하면서 마지막 '그냥 이렇게 산다'란 말에 온 힘을 다해 책을 읽듯이 또박또박 큰소리를 질렀다.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절규를 허공을 향해 마치 그것이 삶의 확실한 답이라도 되는 양 몸부림치듯 소리치고 있었다.
그때 어둠 저편에서 안씨가 말했던 망치소리가 박 선생의 귓가에 돌아갈 수 없는 지난날의 슬픈 사연으로 탕탕 울리는 것이었다.(完)

 

 

'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수상 소감(受賞所感) 』---(2)  (0) 2008.04.21
『 수상 소감(受賞所感) 』---(1)  (0) 2008.04.18
『……』--- (3)  (0) 2008.04.14
『……』--- (2)  (0) 2008.04.13
『……』--- (1)  (0) 2008.0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