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을 가려면 입학시험을 보기 전에 학력고사란 것을 치르던 시절이 있었다.
만점이 340점이었는데 기억에 안씨는 320점 이상을 받아서 도내에서 수석을 하였고 서울대 법대 법학과를 자기 집 방문 열고 들어가듯 그렇게 쉽게 입학하였다.
그때 박 선생이 안씨를 담임하였다.
박 선생은 안씨가 가정 형편이 어려운 것까지는 알았는데 어느 정도로 어렵고 도대체 어떻게 살아가는지는 자세히 몰랐다. 그런데 안씨가 학교에서 주는 장학금으로 입학을 하고 대학 일 학년 한 학기를 다니다가 마침 방학을 맞아 집으로 내려온 김에 모교를 찾아왔다. 그리고 박 선생을 만나 하소연을 하였던 것이다. 그때 안씨의 집안 속사정을 알게 되었고 이십 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그의 얘기가 박 선생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것이다.
"선생님은 제가 공부를 하고 싶어 한 줄 압니까?"
"……?"
안씨는 평소 과묵한 성격에 어른들이나 선생님들께는 무척 예의 바르고 고분고분하던 학생이었지만 몇 개월 사이에 이미 많이 변해 있었다. 서울에서 보낸 젊은이의 너덧 달은 시골 선생님의 몇 년과 맞잡이였을 것이다. 독재정치에 반대하는 데모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일어나는 서울 한복판에 팽개쳐진 어수룩한 시골 청년의 가치관은 얼마나 혼란스러웠겠는가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할 일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공부나 한 겁니다."
"……"
그 당시의 안씨는 변했다기보다는 눈에 살기를 띤 맹수처럼 달려들었다.
그것도 맞수를 찾아 세상을 한바퀴 돌아온 투사처럼 아예 빈틈을 주지 않으려는 듯 무심코 있는 상대를 순식간에 왈칵 달려들어 할퀴었다. 박 선생은 아무 대꾸를 할 수도 없었거니와 안씨가 왜 그러는지를 알아내려고 그저 눈치만 살피는 꼴이 되었는데 몇 달 전만 하더라도 이런 상황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박 선생은 학교에서 호랑이로 소문난 선생님이었고 학교의 학생생활지도를 담당하였기 때문에 감히 대든다는 것은 하늘아래 있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 날은 상황이 달랐다.
온갖 준비 끝에 안씨는 단단히 무장을 하고 왔으며 박 선생은 전혀 생각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냅다 디밀었으니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다. '섣불리 건드렸다가는 낭패를 당하기 십상이다. 이런 때는 오히려 입을 꽉 다물고 녀석이 스스로 답을 토해낼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하고 묵묵부답 아무 말 않고 조용히 기다리기로 작정을 했다.
세상 모든 것이 관심 없다는 식으로 초점 없는 눈을 하고 네가 떠들 테면 한번 신나게 떠들어 보란 듯 입을 다물고 조용히 기다렸다. 안씨가 제 발로 이렇게 찾아 올 때는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을 것을 뻔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냥 돌아가지는 못하리라. 속을 뒤집어 보이고야 말 것이다. 기다리면 된다. 이럴 때 시간은 나의 편이다.'
하고 박 선생은 느긋하게 기다렸다. 아무 말 없이 두 사람은 서로를 지겹도록 지켜보고 있었다. 결국 박 선생이 보이는 세월의 무게 앞에 안씨는 무릎을 꿇었고, 아픈 사연은 눈물과 함께 마술사가 토하는 입 속의 실타래처럼 풀려 나왔다.
한석봉처럼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고 했다.
그리고 안씨 어머니가 어려운 생계를 꾸렸단다.
시골구석에서 여자가 돈을 버는 길은 이웃의 농사 품팔이 외에는 거의 없었다. 그것도 맑은 날 말이지 비오고 궂은 날은 더더욱 없었다.
어느 날 우연히 읍내에서 과일상자 만드는 일을 얻었다. 제재소에서 얇게 켜 놓은 송판(松板)을 가져오면 제자리에 짜 맞춰 못질을 하고 사과나 과일을 담는 상자로 만드는 것이다. 물론 여자에겐 힘들고 어려운 일이지만 쉬지 않고 고정적으로 계속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몰랐다. 상자가 만들어지면 트럭으로 싣고 가면서 공임으로 상자 한 개당 몇 백 원씩 쳐주는 것으로 생계를 꾸렸다.
그러니 돈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안씨는 어릴 때부터 잘 알고 있었다.
소풍 가는 날이나 운동회를 끝내고 학교를 일찍 마치는 날은 같은 반 친구들이 만화방이다 당구장이다 하고 놀러가자고 할 때도 따라붙지 못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혼자 빠져 나올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작은 돈이라도 그의 수중에는 없었고 어쩌다 있어도 써야할 곳이 있는 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는 안씨는 혼자 집에 처박힐 수밖에 없었고 자신의 방에 뱀이 똬리를 틀듯 움츠리고 시간을 죽이는 것이었다. 그것도 한두 번이지 매번 겪는 일이라 한창 친구들과 어울려 놀고 싶은 나이에 일찍이 고독을 알고 혼자 외로움에 진저리를 친 것이다.
더군다나 어머니가 상자 만드는 일을 하고 난 뒤부터 방에 들어가서 다리 뻗고 곱게 쉬지도 못했단다.
밖에서 상자를 만드는 엄마의 망치소리가 공부를 하지 않고는 도저히 배길 수 없도록 가슴을 탕탕 치더란 것이다.
석봉이 엄마가 떡을 써는 것 같이 안씨의 엄마는 망치질을 한 것이다. 그리고 그 망치질이 자신의 가슴을 치는 것처럼 석봉이 엄마의 떡을 써는 칼질은 석봉이의 어린 가슴을 잠시도 쉬지 않고 난도질했을 것이라고 느껴지더란 것이다.
안씨는 애써 이야기를 마치자 얼굴을 파묻고 어깨를 들썩이며 짐승처럼 울부짖었고 박 선생은 모로 쓰러지는 안씨의 얇은 등을 두들겨 패기라도 하듯 힘껏 쓰다듬으며 말없이 창 밖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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