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을 마치면 하는 일 없이 교무실에 앉아 퇴근시간을 기다리는 게 제일 싫었다.
특별히 남아서 해야하는 업무가 없으면 무슨 핑계를 대든지 학교를 빠져 나와야 직성이 풀렸다.
그리고 가까이 앉은 다른 선생님에게 하는 말,
"나의 퇴근을 적에게 알리지 마라."
싱긋 웃으며 농처럼 뱉는 말이었다.
웃기는 일은 내가 하도 많이 쓰니 나중에 다른 선생님들이 내가 가방을 들고 주섬주섬 책상을 정리하면 벌써 '적에게 퇴근을 알리지 않겠습니다.'하고 선수를 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중에는 그냥 나오기가 멋쩍어 헤르만 헷세의 [먼 훗날]이란 시를 읊조렸다.
"어여쁜 소녀
날 찾아와 묻거든
멀리 전선으로 떠났다고 전해주오.
아무 말 없었냐고
묻거든
말없이 떠났다고 전해주오.
소녀의 눈에
눈물이 고이거든
그도
울면서 떠났다고 전해주오."
이었는데…….
마지막 [먼 훗날]이란 행은 여운으로 남기고 교무실을 빠져나오는 것이었다.
물론 날보고 일찍 퇴근한다고 나무랄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일 년을 시쳇말로 농땡이를 치다가 허울좋은 이름의 명예퇴직을 하고 학교를 빠져나왔다. 그것도 마치 여우가 손이 닿지 않은 포도를 보고 저 포도는 아직 덜 익어서 실 것이라는 시답잖은 핑계를 대듯 요즘 아이들 옳게 선생 취급을 해 주지 않는다고 하면서 말이다.
어차피 가르치려고 선생으로 들어갔으면 아이들이 나쁘면 고쳐주고 가르쳐야 하는데도 요즘 아이들이 어떻다고 하고 빠져나온다는 것은 누가 봐도 옳은 이유가 아니다. 언제는 아이들이 좋아서 교편을 잡은 것은 아니지 않는가. 옛날 사람들도 자기 다음세대를 걱정하고 나무랐지만 그들이 걱정한 것처럼 세상이 무너지고 끝나지는 않았다.
군을 제대하면서 저런 녀석들에게 나라의 국방을 맡기고 나가서 발뻗고 잠이나 잘까하고 후배들을 걱정했지만 나라는 끄떡없고 지금껏 잘 돌아가고 있지 않은가. 아무리 바보 같은 지도자를 뽑아도 나라는 망하지 않고 아무리 독재자가 설쳐도 권불십년이란 말처럼 다시 세월이 흐르면 자리를 찾아 돌아오는 것이 세상이다.
내가 그때 조금 일찍 퇴근을 한다고 무슨 큰 일이 일어난 것도 아니고,
또 그 다음날은 다음날대로 많은 시간이 날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살면서 터득한 것이 시간이다.
걱정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 그 때 걱정하던 일들이 아무 것도 아니었고 시간이 흐르면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
억지로 속 썩이며 걱정할 필요가 없구나하는 것을 알았단 이야기다.
내일은 또 내일 해가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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