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사랑의 매 』

일흔너머 2008. 5. 26. 00:43

 

정글에서 집단생활을 하는 사자는 거의 모든 일을 암사자가 한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사냥을 할 때도 수사자는 그저 먼발치서 위협적인 고함이나 한두 번 지르는 정도로 하는 일이 다다. 그러나 사냥이 끝나고 만찬을 즐길 때는 상황이 다르다. 맨 먼저 수사자가 달려들어 사냥감의 가장 맛있는 부분으로 배를 채우고 나면 남은 음식을 위계에 따라 나눠 먹는 것이다.


이렇게 자연에서 행해지는 일들이 노력과는 아무 상관없는 모순으로 보이지만 집단생활을 하는 사자들에게 수사자의 위기대처능력을 생각하면 자연스러운 것이다. 물론 늙고 병들어 집단을 이끌 능력이 없어지면 그 집단에서 쫓겨나고 버림받는 것 또한 당연한 것이다.

"여보 쟤들 봐요. 그리고 막내 저 녀석, 뭐라고 좀 나무라세요. 공부도 않고…"
아내는 아이들을 나무라고 타일러 보다가 말을 듣지 않으면 결국 자신의 능력 밖이라 내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다.

보통 이럴 때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어도 상황은 벌써 끝나 있다.


집사람이 '여보'라고 가장(家長)인 나를 들먹일 때 아이들은 이미 겁을 집어먹고 자신의 위치로 돌아가 하던 장난을 멈추는 것이다. 이런 경우 집사람의 말이 내 의식에 아무런 메시지를 전달조차 하지 않았는데 아이들은 아버지의 위엄을 이미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래서 그냥 '아버지'라는 그 말 한마디로 집안은 정상의 흐름을 찾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때는 아이들의 장난이 정도가 지나쳐 겉잡을 수 없는 분위기가 될 때도 있다. 이런 경우조차도 나는 아이들에게 일일이 나무란 적이 없다. 그저 어디랄 것도 없는 허공을 향하여 수사자의 울음소리 같이,
"어허……!"
하고 한마디 으르렁거릴 뿐이다.
그걸로 집안에서 일어났던 모든 상황은 끝나는 것이다. 이런 것을 위엄이라 하는지 착한 아이들의 순종이라 하는지 나는 모른다.

다만 이래서 가정이란 한 작은 집단의 질서가 잡혀지더란 것이다.


평소 아내는 아이들과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자주 나눈다. 이것은 엄마의 살갑고 따뜻한 정이다. 물론 아버지인 나도 자식들과 그런 사이가 되었으면 하고 바란다. 자기의 자식을 사랑하고 정을 준다는 것은 본능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제치 못하고 기분 내키는 대로 그랬다간 누가 이 가정을 지킨단 말인가? 가정도 한 집단이다. 싫어도 집단을 지키고 버티는 악역을 맡아야 할 사람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평소 과묵한 친구가 하던 말이 생각난다. 「사나이는 할 말을 다 못하고 산다」는 것이다.
나는 네가 좋다.
……무척 사랑한다.
……사랑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다.
그러니 모든 것을 이해하길 바란다는 등, 꼬치꼬치 따지고 설명하며 그렇게 살 수는 없다는 것이다. 어지간하면 말을 아끼고 가슴과 가슴으로 미루어 짐작하며 살아가는 것이 사나이들의 세계란 것이다.

 

학교에서 근무하는 나는 체벌에 대한 논란이 일 때마다 현실이 우습다.
우리들 과거에는 그저 맞고 자랐다. '잘못했다'고도 맞았고 '고놈 귀엽다'고도 꼬집혔다. 그것을 인격 운운하거나 폭력에다 갖다 붙이는 일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집에 가서는 선생님에게 맞았다고 감히 얘기하지도 못 했다. 학교에서 선생님께 꾸지람을 들었다거나 맞았다면 부모님의 또 다른 처벌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희 부모님을 학교에 오시라고 해'하는「학부모 호출」의 벌이 가장 무서운 시절이었다. 집에 돌아와 부모님께 선생님께서 학교에 오시라고 했다는 말을 감히 할 수가 없었다. 또 무슨 잘못을 저질렀느냐고 자식들을 먼저 나무라셨기 때문이다. 물론 그 때는 학부모가 학교에 들락거릴 정도로 한가하지도 않았고 시간이 있어도 선생님을 대한다는 자체가 무척 어려운 시절이었다. 지금처럼 선생님을 쉽게 대하지 못했다는 얘기다.


그러나 요즘은 다르다.

모든 척도를 경제에 우선하는 바람에 선생님의 인격은 괄호 밖으로 밀려난 지가 오래다. 아무리 좋은 학교를 나와 실력 있고 인격을 갖춘 선생님이라도 경제가 따라주지 못하면 존경받지 못한다. 속말로 백그라운드가 시원찮다는 것이다. 조그만 구멍가게나 시답잖은 음식점만 운영해도 수입이 선생님보다 많아서 중형차 이상을 타고 다니는데 존경하는 선생님께서 조그만 소형차를 몰고 출퇴근하는 것은 코흘리개들에게도 불쌍하게 보여 놀림감이 되는 것이다. 과거에는 아끼고 검소한 것이 본 받을 존경의 대상이었지만 지금은 멀쩡한 바보가 되는 것이다.

 

어떤 모임에서 서로 인사를 하는데 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는 말에 슬그머니 돌아서 한다는 말이,
"멀쩡한 사람이 선생 하는구먼."
하고 비웃더라는 것이다.
"그럼 병신들이 선생 해야 하는가?"
어찌어찌 흘러가는 이야기를 듣고 어떤 선생님께서 화를 내며 하시던 지난날의 기막힌 농담이다.

이렇게 보면 요즘의 선생은 멀쩡하고 정상적인 사람이 하는 짓이 아닌 것이다. 선생이란 그저 기죽어 사는 형편없는 지식인일 뿐이며 사리사욕에 빠진 정치인이나 시답잖은 인기가수 혹은 코미디언을 높여 부르는 존칭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 뿐인가?
기죽지 말라고 아무렇게나 키운 요즘 아이들.
부모도 마음대로 못하는 천둥벌거숭이 같은 아이들.
그래서는 안 된다고 타이르는 노인을 귀찮은 잔소리한다고 지하철 계단에서 밀어 결국 숨지게 하는 것이 현실이다.

 

폭력이 난무하는 할리우드 영화들은 부모도 쉽게 죽이는 잔학성이 있다. 그러나 허구로 만들어진 그 영화를 보고 영화처럼 되지 않으면 끓어오르는 기운을 주체치 못하고 난리를 치고 심지어 자기도 죽여버리는 것이다. 고등학교에서 학생이 총을 난사하여 십 여명이 죽었다는 외신보도가 다반사로 들린다.

 

참을성 없고 앞뒤 판단력 없는 청소년은 우리 주위에 얼마든지 있다. 그들이 자제하도록 다듬어지고 교육되지 못하면 삶이란 큰 흐름을 잃고 순간적인 감정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영화에서는 총만 들면 세상 무서울 게 없다.

그리고 내 죽으면 그만이라는 생각, 신(神)마저 거부하는,

이것이 현실이다.

 

평소에 너무 사랑, 사랑하지 말고 차라리 엄하게 나무람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고 잘되라는 명분을 달아 안타까워하며 때리지도 말아야 한다. 결국 사랑의 매라고 하지만 받아들이는 학생이 사랑으로 느끼는 경우는 거의 없다. 세월이 흐르고 자신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면 그때 가서 사랑으로 느낄지는 몰라도 대부분은 그냥 지독한 학창시절의 추억만 만들뿐이다.


이미 비뚤게 자란 나무를 똑바로 만들려고 억지로 휘면 부러지듯 시기를 놓치고 습관이나 성격이 다 형성된 뒤에 고쳐 보겠다는 것은 매가 아니라 세상 무엇으로도 어려운 일이다.

스스로 그 어떤 계기가 찾아와 깨닫기 전에는 천성(天性) 고치는 약은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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