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땅이 넓어서 그런지 멀리 진시황의 조각상을 세우고 주차장이 그렇게 넓을 수가 없었다...! ]
우리가 서안(西安)을 찾은 가장 큰 이유는 두말할 필요 없이 진시황제의 흔적이다.
지금 중국을 영어로 차이나(China)라고 하는 것도 바로 이 진(秦)에서 따온 것이다. 그만큼 진나라는 최초이자 또 강력한 통일 체제를 이룬 나라이었다. 그 최초의 황제가 진시황인 것이다.
여산(廬山)은 산시성 시안에서 30km 정도 떨어진 동산이었다. 기원전 246년에서 208년까지 39년간 공사를 했단다. 지금 진시황릉은 옛 진나라의 수도 함양 서쪽 부근이었다. 현재 남아있는 규모가 가로 세로 500여m 높이가 또 그 정도라고 한다.
겨울 찬바람을 맞으며 우리는 한참을 걸어 올라갔다. 주위는 온통 측백수림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소나무인데 이들은 대게 그렇듯 측백나무를 많이 이용하는 것 같았다. 산동(山東)의 공자묘도 그랬고 자금성 주위에도 그랬다.
시간이야 얼마가 흘렀건 또 역사야 어떻게 되었건 이렇게 한 세기의 주인공, 진시황제의 무덤을 딛고 올라섰다는 마음은 정말 야릇하였다. 내 한 몸도 가누지 못해 비틀거리며 올라왔지만 바람은 나에게 분명 사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다는 걸 말하는 것 같았다.
'봐라, 천하를 쥐락펴락 하던 영웅도 이렇게 누워버리면 누가 그의 위세를 느낄 것인가? 거저 욕심 없이 바람처럼 그렇게 스쳐 지나는 것이 인생이니라.'
우리는 잠시 생각을 멈추고 진시황릉에서 1km가량 떨어져 있는 「병마용갱(兵馬俑坑)」을 찾았다.
마침 관광객이 적어서 다른 사람들의 방해를 받지 않고 우리끼리 이것저것 돌아볼 수 있었다.
흙을 구워 만든 병사, 말 등의 모형이 있는 갱도인데 1974년 농민이 우물을 파다가 우연히 발견되었다.
[ 사인이 끝난 후 손을 잡고 악수까지 하는 예절을 보여주었다....! 돈이 뭔지? 사회주의 죽의 장막이 걷히고. ]
나는 이 농민을 직접 만났는데 병마용갱의 안내 책자에 사인(Sign)을 해주고 사진도 함께 찍으며 얼마의 돈을 받는 일을 하고 있었다. 사인을 하는 손은 분명 농부의 거친 손인데 어떻게 배우고 노력했는지 글씨를 반듯하게 그리고 달필로 사인을 해 나를 놀라게 했다.
병사의 모형은 키가 실물 크기의 약 사 분의 삼 정도로 만들어졌는데 그 얼굴이 각각 다르다. 가이드 말로는 전체가 모두 다르게 제작되었고 그 당시에 염료를 사용하여 만약 발굴을 해두면 지금의 기술로는 보존처리가 어려워 그 염료가 탈색되는 까닭에 발굴을 멈추고 있는 상태라 했다. 그래서 현재 발굴된 4개의 갱도에 모두 6천여 점의 병사와 상당수의 전차 그리고 말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단다.
이런 훌륭한 조상을 둔 그들이었지만 찾아간 우리들이 보는 중국인들은 못나도 정말 그렇게 못날 수가 없었다.
물론 모든 중국인이 그렇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여행 중 당한 두 가지 이야기만 예를 들어 보자.
우리 일행 중에 한 분이 여행객을 상대로 기념품을 파는 사람과 약간의 다툼이 일어났다. 왜 그러느냐고 물으니 그 분 이야기가 기가 막혔다. 병용을 토기로 만든 것을 여섯 개 정도를 통에 넣어 십 위안하더란다. 그래서 십 위안을 주니까 그 중에서 한 개를 꺼내 주더라는 것이다. 그 상인은 한 개에 십 위안이라고 했다며 고집을 부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돈을 돌려 달라니 그것도 안 된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운동화를 이십 위안이라고 하기에 허드레로 막 신고 다니면 되겠다 싶어서 이십 위안을 주고 신발을 달라고 하니까 상인은 운동화 한 짝을 주더라는 것이었다. 그러니 한 켤레를 원하면 이십 위안 더 내라는 것이었다. 이런 경우 당하는 사람은 황당하기 짝이 없다.
그러니 중국인들과 거래를 할 때는 항상 물건을 먼저 받고 돈을 주라는 것이었다. 물론 그것도 잔돈으로 주어야 하지 큰 액수의 돈을 주고 거스름을 기다리다가는 또 다른 낭패를 본다. 백 위안 짜리를 주고 이십 위안 짜리 물건을 사면 물건을 받고 돈을 보이고 팔십 위안의 잔돈을 받고 백 위안의 지폐를 건네라는 것이다.
아무리 신경을 써도 습관은 어쩔 수 없다.
원래 서안이란 도시가 과일이 잘 자랄 정도로 기후가 온화하여 온갖 과일이 풍성하다. 길거리에서 홍시나 석류 같은 과일과 고구마 감자 혹은 옥수수를 삶아 파는 노점상이 많았다. 이왕 이렇게 온 김에 점심식사 후에 홍시라도 하나씩 먹도록 돌려야겠다고 두 상자를 이십 위안에 샀다. 우리 나라로 치면 삼천 원에 불과한 금액이다.
그런데 막상 점심을 먹고 상자를 열었을 때 다들 놀랐다. 위에는 맛있는 홍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그것을 들치자 먹지도 못할 정도로 상한 굵은 홍시 네 개가 받치고 있었다. 일일이 들쳐보고 살 수 없는 우리의 사정을 잘 아는 그들만의 짓거리인 것이다. 아마 우리가 그것을 사서 버스에 오를 때 우리의 뒤통수에 대고 웃으며 손가락질하는 못난 중국인들을 생각하면 분통이 터졌다. 실크로드나 돈황의 석굴을 보러 아마 서안에 다시 가는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때는 그들의 그런 행실을 여러 사람에게 알려 다시는 그런 노점상을 이용하지 마라고 할 것이다.
[ 화청지에는 뜨거운 온천수가 지금도 계속 흘러 나왔고 손을 담그고 한번 정도 체험할 수 있었다. ]
점심을 먹고 화청지(華淸池)에 들렀다.
화청지는 당나라 화청궁의 온천지이다. 여산 서북 기슭에 있는 온천지로 진시황 때 돌을 깎아 집을 만들었다고 한다. 가이드의 말로는 여기가 바로 당 현종-이융기(李隆基)가 양귀비와 즐기던 곳이라 했다. 흰 칠을 한 양귀비의 상을 입구에 조각해 놓았다.
양귀비(楊貴妃)는 서시, 왕소군, 초선과 더불어 중국의 4대미인 중의 한 사람이다.
그러나 양귀비는 체구가 엄청 크고 몸무게가 팔십 킬로가 넘었다고 한다. 누가 본 사람이 없으니 알 수는 없지만 미의 기분은 역시 주관적이란 이야기다. 그렇지 않으면 못 생기고 뚱뚱하거나 비쩍 마른 사람은 짝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랑이란 콩깍지가 쓰이면 어디 몸무게나 키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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