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

『 홍콩, 그 자유 발랄함 』---(1)

일흔너머 2008. 10. 4. 07:09

 

 

마카오에서 배를 타고 델타강을 건너 심천으로 가는 뱃길은 말이 강이지 바다와 다를 바 없었다. 아내와 나는 사람들의 냄새와 꼭 끼는 작은 의자를 피해 선상으로 나왔다. 여기서도 중국사람들의 상술은 어쩔 수 없었다. 쾌속선이지만 선상을 잘 정리하고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커피 한잔을 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지도록 자리를 마련하고는 가격을 4달러라고 했다. 나는 아내와 함께 올라갔다. 그것도 처음에는 두 사람이 4달러인 줄 알고 그 정도이면 괜찮다고 멍청하게 올라갔다가 일인당 4달러라는 바람에 바가지 쓰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어쩌나?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8달러를 지불하고 배가 심천으로 가는 한 시간 여를 즐기기로 했다.


심천은 너무 발전하여 우리를 안내하는 가이드뿐만 아니라 관광버스 운전사조차도 길을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목적지를 찾아 헤매다가 길을 잃어버리고 결국 그 지역의 택시를 잡았다. 그리고는 버스가 택시 가는 대로 뒤따라가는 것이었다. 안내하는 가이드는 이런 행동을 우리에게 이해를 시키려 애를 썼다. 말이 한 도시지 서울의 너덧 배는 되는 크기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새로운 길이 며칠 사이에 생기니 어쩔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도시가 크다고 해도 관광 버스 운전사가 모른다면 그것은 자기 직업에 대한 전문성이 떨어지는 것이다. 우리 나라 같으면 벌써 밥그릇 잃어버릴 사유에 해당되겠지만 중국은 아직도 그런 면에서는 인간적으로 유야무야(有耶無耶)하며 넘어가는 가보다.


심천에서 홍콩은 또 다른 나라로 옮기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마카오에서 심천으로 올 때 중국 비자가 필요하고 심천에서 홍콩으로 올 때 홍콩 비자가 필요하였다. 우리는 중국 속의 또 다른 중국, 홍콩으로 가기 위해 출국 수속을 마치고 작은 유람선, 페리를 탔다. 물은 더러웠지만 홍콩항은 국제항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배들로 번잡하기 짝이 없었다. 나중에 야경을 구경할 때 느꼈지만 우리 나라의 기업들이 선전하는 네온사인 간판들이 다른 선진국의 내노라는 기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려있는 것을 보고 속으로 흐뭇하였다. 내가 이렇게 여행할 수 있는 것도 그 만큼 우리가 경제적인 부를 이루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홍콩, 정식 명칭은 중화인민공화국 홍콩특별행정구(中華人民共和國 香港特別行政區)이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구룡반도(九龍半島), 산까이(新界) 및 그 외 200여 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편 전쟁이후 1898년에 영국은 홍콩과 인접한 섬들과 신계(新界)지를 99년 간 조차 받는다. 중국의 한족이 홍콩에 많은 이유는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그 박해를 피해 온 도망자들이란다.


1997년에 홍콩의 주권을 영국에서 중국으로 이전하는 것에 동의하고 홍콩이 50년 동안 법과 자치권을 유지하는 특별 행정 구역으로 남을 것을 영국과 중국이 합의하였다. 결국 홍콩 주권양도는 1997년 7월 1일 자정을 기점으로 치러졌고 둥젠화(鄧建華)는 홍콩의 첫 번째 홍콩특별행정구행정장관(香港特別行政區行政長官)으로 취임하였다.

 


나는 그 현장을 갔다.

그리고 홍콩 국기가 황금빛으로 빛나고 그 앞에는 홍콩 앞 바다가 출렁이는 곳을 바라보며 국가의 흥망성쇠를 생각했다. 중국은 이런 면에서 대단하다. 아무리 나누어지고 합쳐져도 대륙은 그냥 그대로라는 식으로 굳건히 지키며 기다리는 것이다.

 

아마 모르긴 해도 타이완도 결국 하나의 중국이란 그들의 기치대로 머잖아 중국으로 합쳐져 들어가고 말 것이다. 장개석이 그렇게 국민당을 이끌고 자유민주주의를 외쳤지만 영웅은 그저 한 시대를 풍미할 뿐 도도히 흐르는 역사를 멈출 수는 없는 것이다. 나는 젊은이들이 서로 손잡고 거니는 '사랑의 거리'로 걸어가며 혼자 나름의 역사를 생각해 보면서 피식 웃었다.

이게 사람 사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