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 유모차 』

일흔너머 2009. 11. 23. 11:55

 

 

햇빛이 한창 따스할 때 강가 산책을 나섰습니다.

추운 겨울에는 이렇게 바람이 자고 볕이 좋을 때 걷는 것이 한기에 대한 부담이 적어 아무래도 좋습니다. 금호강 물은 더러워도 웬 고기가 그렇게 많은지 강가를 걸으며 아내와 나는 어른 팔뚝보다 큰 고기들이 어슬렁거리는 모습을 보며 감탄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쩌다 생각나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한참을 걷다가 생각하니 아들이 사는 아파트 가까이 온 것 같았습니다.

어제 아들과 며느리가 왔다갔지만 점심때도 되었는데 어떻게 지나는지 우리 가서 차나 한잔 마시자고 의견일치를 보았습니다. 아무리 아들이지만 전화를 하고 가야합니다. 물론 오라고 대환영이지만 말입니다. 하도 찾아가지 않았으니 그럴 겁니다. 가다가 아내가 점심 겸 먹을 김밥을 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왔다고 며느리가 억지로 밥을 챙기고 하느니 그저 김밥 한 줄씩 먹으면 좋을 것 같아 얼른 몇 줄을 사서 아들의 아파트로 갔습니다.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요즘의 젊은이들은 살림을 아주 잘 합니다. 들어가는데 벌써 집안에 훈기가 넘칩니다. 정리는 똑 소리나게 잘 하는 며느리니까 어디 나무랄 때가 없습니다. 점심도 먹고 차도 마시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아들이 샀다는 유모차를 꺼내 왔습니다. 모양도 그렇고 기능도 우리가 보면 상상을 초월하는 대단한 것입니다.

 

좋은 물건 잘 샀다고 칭찬을 하고 돌아오면서 어려운 살림을 꾸려오던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그 옛날 이야기를 했습니다.
"대구백화점에 유모차 사러갔다가 쓰리 당하고 간 곳이 어디제?"
"형님한테 아인교. 수박도 깨고."
아내도 그 날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정말 운이 없는 날이었습니다.

시골에서 어렵게 돈을 모아 유모차 산다고 대구에 올라온 날이었습니다. 날은 왜 그렇게 더웠는지. 까짓 유모차, 아무데서나 사면 어떤데 하겠지만 그래도 들은 것은 있어 가지고 대구백화점으로 갔습니다. 아이는 들쳐업고 기저귀가방은 들고 영락없는 시골 아낙인 아내에게 소매치기가 가만둘 리 없었습니다.

 

유모차를 고르고 돈을 지불하려고 가방을 보던 아내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내 지갑'하였을 때는 이미 유모차는 우리로부터 멀리 떠난 뒤였습니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저 아쉬워하는 아내를 달래고 죄 없는 백화점을 돌아보며 '다시는 대구백화점에 발길을 주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나왔습니다. (사실 그 일 이후로 이 백화점에 십 수년 발길을 끊었습니다.) 유모차를 사러온 것 외에는 마땅히 볼일이 없었으니 갈 곳도 없었습니다.

 

다행히 내 지갑에 약간의 돈이 있었지만 그것으로 유모차를 사거나 할 수는 없었습니다.

커다란 수박을 하나 사서 들고 오랜만에 처형한테 인사나 하고 가야겠다며 들렀습니다. 처형은 반갑게 맞아 주었습니다. 시골에 살다보니 하도 오랜만에 만나 반가운 마음에 서로 인사를 나누며 문 앞에서 수다를 떠는데 지금까지 잘 들고 갔던 수박이 묶인 줄이 풀리면서 땅바닥에 철버덕 떨어져 나뒹구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박살이 났고요.

 

정말 운이 없는 날이었습니다.

우리가 살다가 이렇게 기가 막히는 날은 추억이란 말이 맞는지 기억이란 말이 맞는지 모르지만 머리 속에 앙금처럼 오래 가라앉아 있다가 어떤 계기를 만나면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비가 오기 전 지렁이가 기어 나오듯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겁니다.

 
돌아오는 강둑 길에서 아내는 며느리가 끓여 준 쇠고기 국이 살림 수십 년 한 주부가 끓인 국처럼 깊은 맛이 들어있었다며 감탄하였습니다.
"응 그래, 무가 맛이 있더군."
맞장구를 치며 둑길에 심어진 저 벚나무가 화사하게 꽃을 피울 내년 봄을 기대해 봅니다.

오늘은 날이 참 화창합니다.

이런 날은 걷기에도 그 옛날을 생각하기에도 또 정을 나누기에도 좋은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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