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

일흔너머 2010. 2. 8. 12:54

 [ 지금은 기차가 다니지 않는 대구선 철교, 한때 이 기찻길에서 기적소리가 낭만적으로 들렸는데... ]

 

어릴 때 누나의 손을 잡고 친지의 집에 간 적이 있다.

금호강가의 강촌이었는데 정말 한적하고 좋아 보였다. 소월의 시에 나오는 금모래가 뒤뜰에 퍼질러 있고 갈대가 띄엄띄엄 무리 지어 있는 풍경은 아직도 내 기억 속에 생생하다.


사람들은 항상 자신이 가진 그런 기억을 동경하고 언제나 기회가 오면 실천에 옮기고 싶어한다.

만약 우연한 기회에 마음 속에 있는 그런 기억을 현실로 만들었다면 그것은 성공한 삶이고 행운이다.


이십여 년 전에 우연히 직장을 옮기면서 거처를 도회지로 옮기게 되었다. 시골에서 대처로 옮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선 어수룩한 아이들이 문제였다. 마땅한 집이 있는지 친구에게 살펴봐 달라고 부탁을 하면서 조건은 딱 한가지, 한창 초등학교를 다니던 우리 아이들 셋이 횡단보도를 건너지 않고 학교를 다닐 수 있는 집을 찾아달라는 것이었다.


지금도 사려 깊은 그 친구에게 고맙게 생각하지만 정말 많은 배려를 하여 지금 살고있는 이 집을 구해주었다. 처음 이사를 올 때 초등학생이었던 아이들은 자라서 지금 모두 자신이 아이의 엄마 아빠가 되었다. 시골에서 자라 도회의 번잡한 구석을 어떻게 이길까 걱정했던 것보다 훨씬 잘 적응 해 주었고 아무 탈 없이 삼십 년 가까운 세월을 나는 이 집에서 살고 있다.


오랜 세월을 한 곳에서 살다보니 집에 정이 들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이사를 가고 또 부동산 값이 올랐다고 좋아하는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겨졌다. 그저 사는데 불편이 없고 개인적인 공간이 보호받을 수 있으면 그만인 것이 집이다. 물론 자신이 평소에 그리던 그런 곳이면 말 그대로 금상첨화다.


집에 관한 한 지금껏 정말 복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내가 살고있는 이곳의 땅이 재개발을 한다거나 무슨 도시계획에 의해서 쫓겨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라에서 별 관심 없이 팽개쳐 두어서 충청도의 세종(행정)도시처럼 온 주민이 모여 어쩌면 좋을까 눈치보지 않고 오직 내가 사는 데만 전념하였다는 것은 정말 행운이다. 아무 변화 없이 사는 것 그것만큼 행복한 것이 어디 있을까.


거기다가 가까이 강이 흘러 산책하기 좋고 둔치에 널찍한 주차장이 있어 어쩌다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불편함이 없어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얼마 전에는 가까이 고속도로와 잘 연계되도록 톨게이트도 하나 생겼다.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구청이 있고 대여섯 개의 크고 작은 학교가 있고 종합병원도, 기차역도, 심지어 비행장까지……. 불편함이 없다.

그러나 밤이면 어느 산골처럼 적막감이 드는 곳, 바로 지금 내가 사는 곳이다.


삼십대 중반에는 퇴근하여 돌아오면 옷을 갈아입고 강변을 따라 달리기를 하였다.

요즘 말하는 조깅을 한 것이다. 운동도 중독성이 강하여 거의 매일을 뛰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속력은 줄어들었고 오십이 넘어서는 그렇게 좋아하던 달리기를 포기하였다. 그저 등에서 약간의 땀이 날 정도로 걷는다. 그것도 두어 시간 걷다가 차츰 시간이 줄어들었다. 나이와 함께 걸음조차 느려지면서 요즘은 뭇 사람들이 나를 추월해 간다.

 

하지만 아무리 느려 터져도 끝까지 강을 따라 걸을 것이다.
집에서 몇 발자국만 나가면 강이 있고 또 맑은 공기가 좋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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