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

『 실크로드 - 소문보다도 더 험한 길 』---(6)

일흔너머 2010. 5. 22. 16:20

 

[쿠무타크 사막의 관광지 입구에 낙타 모양의 출입구 그리고 안내판. 광장은 어딜 가나 이렇게 넓었다...]

 

중국 여행에서 제일 즐거운 일은 빵을 마음대로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흔히 '꽃빵'이라는 중국식 식빵을 나는 좋아한다. 아니 좋아한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냥 중국 여행기간 동안 마음놓고 실컷 먹을 수 있다는 것이 맞는 말이다. 우리나라의 밀가루 음식, 빵이나 국수를 먹으면 두드러기가 난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실컷 먹고도 아무렇지 않다는 것이다.

 

전문가가 아니니까 잘 모르지만 우리나라의 밀가루에는 많은 방부제가 섞여있어서 그런 것 같다. 밀이 수입되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방부제를 넣어야 그 긴 운반기간을 썩지 않고 견딜 수 있을까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된다. 자국에서 생산되는 먹거리가 아니면 이런 손해를 보는 것이다. 우리는 중국 사람들과 중국 음식을 더럽고 불결하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정작 더럽고 나쁜 음식은 겉으로 깨끗하게 보이고 속에는 많은 방부제가 들어간 우리나라 음식이 아닐까?


아침을 호텔 뷔페로 넉넉히 먹고 가벼운 기분으로 버스에 오르면 하루의 여행은 시작된다. '어젯밤은 잘 주무셨습니까?'로 시작되는 인사를 나누고 가이드는 일정을 이야기하고 우리는 그저 홀가분한 기분으로 보고 듣고 느끼며 즐기면 되는 것이다. 행복한 하루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보고 싶었던 사막을 찾아가는 것이다. 모래만으로 이루어진 사하라와 같은 사막 '쿠무타크(?木塔格)'를 향했다. 쿠무타크는 선선에 있다. 선선은 인구 약 20만 정도의 오아시스 도시다. 기원전 176년경에는 누란이란 이름의 나라였는데 한나라의 침공으로 속국이 되면서 선선이라 이름이 바뀌었다.


우리는 하밀에서 약 4시간의 이동으로 선선에 도착하여 쿠무타크 사막을 찾아갔다. 일부러 관강객을 맞이하기 위해 아이들 장난감 같은 작은 전동기차를 준비하여 1킬로 남짓 달리면 바로 사막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명사산에서 경험한 사막과 또 다른 사막을 보았다. 아니 느꼈다. 아, 이것이 정말 사막이구나 싶은 온통 모래뿐인 황량한 사막을 말이다. TV에서 사하라 사막을 보면 끝도 없는 모래 벌판에 펼쳐지는데 바로 그런 사막을 본 것이다.

 

[관광객들에게 지프를 태워 사막을 달리는 낡은 차가 있었다. 하지만 위험하다면 모두 타지 않았다...다들 어른(?)들이라...ㅎㅎ]

 

여행을 마치고 돌아보면 한가지 후회가 된다. 왜 그랬는지 몰라도 모래를 너무 겁낸 것 같은 일정이었다. 신발을 훌훌 벗고 맨발로 그 사막을 한번 걸어보지 못한 것이다. 발에 느껴지는 촉감, 햇빛에 뜨겁게 달궈진 그 느낌을 맛보지 못한 것이다.


원래 계획은 저녁에 먹기로 되어있었지만 저녁에는 관광객이 붐빈다는 이유로 점심에 카자흐 족들의 양고기 바비큐를 먹기로 하였다. 식당은 미로처럼 꼬불꼬불한 길을 돌아 여러 개의 방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한창 성업 중일 때는 많은 관광객이 들끓을 것 같았다. 식당의 전속 무용수까지 있었으니 짐작할 수가 있었다.

 

 [ 다 어울리는데 귀에 꽂은 상치가 영 거슬립니다...! ]

 

바비큐는 양 한 마리를 통째 구워오는 것이었다. 남자 무용수 한 명과 여자 무용수 두 명이 춤과 노래로 우리를 그들의 문화로 끌어들였다. 여행에서 나는 자주 무대로 이끌려 간다. 여기서도 많은 사람들 중에 뽑혀 그 무용수들과 함께 양고기를 앞에 놓고 그들이 하는 의식을 치렀다.


카자흐 족이 쓰는 모자, 그리고 조끼를 입고 장난스레 양쪽 귀에는 상치를 꽂고 그리고 칼로 가장 맛이 있어 보이는 부분을 자르는 것이다. 하긴 어느 부분이 맛이 좋은지를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알까마는 그들이 시키는 대로 자르고 먹었다. 그리고 나서 그들과 함께 춤을 추었다. 한참 신이 날 때, 우리 일행 중 체육선생님을 하셨다는 젊은 분이 콜라 병 뚜껑으로 한 눈을 가리고 휴지로 몸을 두르고 춤을 추었는데 얼마나 우스운지 그 카자흐 무용수조차 웃었다. 이런 걸 보면 우리 민족이 얼마나 흥이 있고 신명이 있는지 알 수 있다.


문화는 물과 같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 즉 발달한 곳에서 미개한 곳으로 전파되어 간다는 말이다. 요즘 한류 어쩌고 하면서 우리 문화가 동남아 여러 나라로 퍼져 가는 것은 결국 우리의 문화가 그 만큼 발전되었다는 이야기다. 아마 모르긴 해도 이 무용수들이 우리가 흥겹게 노는 걸보고 그대로 배워 또 다른 장소에서 그렇게 하고 웃으며 우리를 생각할 것이다.


중국 여행을 여러번 했지만 이번만큼 기름지게 먹은 경우는 드물었다. 그저 앉으면 양고기에 돼지고기 그리고 시원한 맥주를 넉넉히 먹을 수 있었다. 그래서 여행을 마치고 목욕탕에서 재어보니 몸무게가 거의 10킬로 가까이 불어 있었다.


오후에는 위그르말로 '아름답게 장식된 집'이란 뜻의 고대 유적 베제크리크(柏孜克里克) 천불동을 찾았다. 투르판 동서쪽 40여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화염산을 앞으로 지나 위치하고 있었다. 화염산 앞으로 도로가 잘 포장되어 있었다. 우리는 그 화염산을 지나는 계곡에서 사진도 찍고 한참을 둘러보았다.

 

 [도로는 왼쪽의 화염산을 구경하기 좋도록 계속 되었다. 한참을 달려 이길이 끝나는 곳이 투루판 오아시스가 있었다...!]

 

그때였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소나기를 만났다. 그렇다고 줄기차게 내리는 그런 비가 아니었다. 그저 어쩌다 내리는 게으른 빗방울이 떨어졌다. 하지만 가이드의 말을 빌리면 정말 어려운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몇 백년에 한번 일어날 일을 우리가 겪었다는 것이다. 하긴 그렇다. 그 사막 한가운데서 비를 만났으니 말이다. 정말 어려운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여기서는 비가 오지 않으니 황토 절벽에 동굴을 뚫어 불상을 모시는 것이다.

 

[ 베제크리크천불동-오래되어 무너지고 방치되어 폐허를 연상케 하였다. 황량한 사막의 가장자리에 누가 정붙이고 살았을까...! ]

 

천불동에는 현재 여든 개 이상의 동굴이 있고 벽화는 마흔 개정도 있다고 했다. 14세기 이슬람의 침입, 20세기 독일의 르콕(Lecog), 일본의 오타니 탐험대에 의해서 거의 도굴되고 현재는 정말 볼거리가 없었다.


우리가 관람하고 있을 때 서너 명의 위그루족이 현악기를 연주하고 있었다. 아라비아의 음률을 아주 경쾌하게 연주하였는데 한참을 듣고 있으니 왠지 슬픈 분위기를 만들고 말았다. 일행 중 누가 몇 푼의 위안화를 주니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우리가 한참 떠나올 때까지 계속 연주를 해 주었다.


이번 여행에서 너무 많은 동굴을 보아서 식상한 탓인지 절벽을 깎아 지은 동굴에 부처를 모시고 법당을 만든 것이 별로 신기해 보이지 않았다. 둔황에서도 그랬지만 유명무실(有名無實)이란 말이 실감났다. 바람에 날려온 누런 흙먼지가 쌓여 만지기는커녕 가까이 가지도 못할 정도로 지저분하게 보이고 이리저리 흩어진 벽돌 부스러기는 무슨 폐허를 방불케 하였다.


역사가 길다는 것은 자랑이다.

하지만 조상으로부터 너무 많은 긴 역사의 문화재를 물려받음으로 해서 결국 일일이 손보지 못하고 방치하는 이런 폐단이 따르게 되는 것이다. 많고 흔하다는 것은 그만큼 가치가 떨어지는 것이다.
이제 불과 이 백년의 역사를 가지는 신생국가 미국은 박물관을 만들어 온 세상의 것을 보관하고 후손에게 물려주려 하고 있다. 몇 천년 역사의 중국이나 우리는 온 산천이 박물관이고 문화재며 역사인 걸 앞으로 어찌할꼬?

돌아나오며 남의 일 같지 않아 자꾸 뒤를 돌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