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 세상 무섭다 』

일흔너머 2010. 9. 6. 12:28

 

 

 

사기꾼은 거창하고 어려운 말을 좋아한다.

마치 못 생긴 여자가 백화점의 유명 상표를 좋아하듯이 꾸미는 것을 좋아한다. 한국 민족 정신이 이렇고 국부역강(國富力强)이 저렇고 하면서 평소 잘 쓰지도 않는 말들을 나열한다.


오래 집을 비웠더니 이층의 아주머니가 그 동안 우편물을 모았다가 아침 출근길에 건네 주었다. 그 우편물에 「현대 한국 인물사」를 발간하는데 사진과 약력을 적어 보내라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뭐가 뭔지도 모를 뜬구름 잡는 이야기였다. 한참을 들여다보니 이렇게 책을 낸다는 명분으로 장사를 하자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당신 이름을 넣어 줄 테니 책을 사라는 것이다. 웃기는 짓이다.


사기꾼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마치 버릇없는 뒷집의 작은 강아지처럼 언제 어디서나 짖어댄다. 채 잠이 깨기도 전에 휴대전화가 울렸다. 몸이 느리고 손이 어둔한 것이 다행이었다. 전화기의 창에 비치는 글자가 보통 때와는 달랐다. 「국제 전화」라는 작은 글씨가 보였다. 친구가 중국 출장을 가면 자주 뜨는 글자지만 지금 그 친구는 한국에 있다.

전화 뚜껑을 제치자, 「삼성 병원입니다. 지금 고객님의 엘지카드가 어쩌고…」하는 여자의 녹음된 목소리가 들렸다. 이때 아무 버튼을 누르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터라 그냥 듣고만 있다가 전화기의 뚜껑을 닫았다.


사기꾼은 작은 틈도 그냥 두지 않는다.

마치 흐린 날 단단한 아스팔트 틈을 뚫고 스멀스멀 기어나오는 지렁이 같이 가만히 있으면 자신이 답답해서 안 된다. 그저 잠시 그냥 있지를 못 한다. 고기를 잡으러 그물을 쳐두고 기다리는 어부 같이 고기가 지나가는 길목을 지킨다.

 

내 블로그에 찾아와 아주 친근한 댓글을 달아놓고 간 네티즌이 있었다. 「혹시 고향이…」라며 자기는 조계종 총무원의 ○○스님이라는 이름까지 밝히고 050-○○○○…라는 전화 번호가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전화를 걸었다.

 

정말 아무 생각 없이 걸었다. 상대가 받으면 어디에 사셨는가를 묻고 사람 살아가는 이야기가 펼쳐질 것이라는 기대는 했지만 크게 의심할 까닭이 없었다. 그러나 전화 번호를 누르고 통화 버튼이 눌러졌을 때 들리는 여자의 목소리는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얼른 종료 버튼을 누르도록 만들었다.
“…… 국제 전화로 연결됩니다.”


월요일 아침, 벌써 세 번이나 사기꾼의 표적이 되다니 험한 세상이다.
무섭다.
세상이 정말 무섭다.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호랑이보다 무서운 곶감 』  (0) 2010.09.09
『 황당(荒唐)과 당황(唐慌) 』  (0) 2010.09.08
『 가슴 아픈 그림 』  (0) 2010.09.04
『 태풍이 지나가고 』  (0) 2010.09.03
『 꽃이 아름다운 건 』  (0) 2010.07.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