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 수세미 』

일흔너머 2010. 10. 6. 13:43

 

 


건강을 위해서 나라마다 하는 짓을 보면 재미있다.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 사람들은 그 민족의 삶의 특징만큼 하는 짓이 다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저 몸에 좋다는 건 다 찾아다니며 먹는다. 구태여 예를 들지 않아도 보신 음식들을 어지간한 사람들은 다 안다. 반대로 일본 사람들은 안 먹으려고 한다. 겨우 연명할 정도의 칼로리만 섭취하는 것이 건강에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중국 사람들은 다르다. 음식은 그저 맛있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건강을 위해서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하는 것이 있다. 운동이다. 과연 건강을 지키는데 어느 방법이 좋은지는 모른다. 모르긴 해도 고루고루 잘 먹고 운동 알맞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일곱 살 박이 외손녀가 항상 감기를 달고 살아서 누가 수세미 액을 먹으면 좋다고 하기에 구해 먹여보니 정말 효과가 있었다. 그래서 올 봄에는 화단에다 친구가 주는 수세미 씨앗을 뿌리고 본격적으로 키워 보려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이번 봄 날씨가 변덕스럽게 추웠다 눈이 내리다가하여 결국 싹이 틀 낌새가 없었다. 너무 기다리다 지쳤다. 그러다가 우연히 시장을 지나가는데 수세미 모종을 파는 것을 보았다. 반갑기도 하고 집에서는 아예 싹이 틀 것 같지도 않고 해서 에멜무지로 두 개 사다 심었다.


처음에는 기대와 달리 연약한 줄기가 겨우 뻗어 어렵게어렵게 나가는데 인간 될 것 같지 않았다. 겨우 일 미터 정도 나갔을 때 진딧물과 무슨 애벌레가 순을 갉아먹고 거미줄을 쳐버리는 것이었다. 앞으로 거창하게 뻗어나갈 것을 예견하고 이리저리 얽고 걸쳐서 튼튼한 받침 줄을 쳐두었는데 아무 소용이 없었다. 햇빛이 비치면 넝쿨은 없고 비닐로 쳐둔 받침줄이 덩그러니 쳐져있어 민망하였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씨앗을 뿌린 것이 하나 둘 싹이 트더니 줄기가 어울려 나갔다.


여름은 유난히 더웠다.

수세미가 아니라 화단 자체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내 몸 하나 피서 다니기 바빴다. 어쩌다 올려다보면 노란 꽃이 순박해 보였다. 수세미 꽃이 이렇게 예쁜 줄 예전에 미처 몰랐다. 수꽃이 피면 호박같이 어쩌다 수세미를 달고 암꽃도 따라 피었다.


그리고 우리가 모르는 가운데 수세미는 열심히 혼자 열매를 맺었다. 처음 팔뚝 같은 수세미 서너 개를 수확했을 때 집사람은 감탄했다. 그리고 설탕을 가져와 정성껏 액기스를 담았다. 그런데 한 보름 피서를 다녀오니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수세미가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하나하나 따 모으니 무려 아홉 개나 되었다. 정말 일 났다. 그 수세미로 다 액기스를 담으려니 단지도 훨씬 더 큰 것이 필요했고 설탕도 많이 필요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자 또 달리고 또 며칠이 지나자 또 달리는 것이었다. 추석을 지나고 찬바람이 불자 이건 줄기마다 조그만 수세미가 너무 많이 달린다. 얼마 남지 않은 계절을 아쉬워하며 하나라도 더 많이 열매를 달려고 하는 수세미의 종족본능이 아닐까.


아무리 비가 자주 온다고 해도 처마 밑에는 빗물이 스며들지 않아 가뭄이 들것 같아 뿌리 주위에 일부러 물을 뿌려준다. 그런데 수세미 뿌리를 보고 놀랐다. 그새 뿌리가 저렇게 굵어졌단 말인가. 봄에는 곧 끊어질 것같이 가늘게 뻗어 나오던 그 줄기가 꽃을 피우고 열매를 키우며 얼마나 용을 썼으면 저렇게 힘줄이 불거졌단 말인가. 삶에 지친 시골 농부의 믿음직한 팔뚝을 보는 것 같다. 매일 올려다보며 노오란 꽃과 시원스레 뻗은 수세미 열매만 신경을 썼지 그 열매를 키우려고 발버둥친 뿌리와 줄기의 거친 숨소리에 귀 기울이지 못한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그나저나 이 가을이 가고 찬바람이 불면 걱정된다.
친구가 수세미 줄기를 자르고 병에다 꽂아두면 맑은 액이 나오는데 화장수로 아주 좋다고 해보라는 것이다. 어릴 때 엄마가 하는 것을 봐서 아내에게 ‘그 정도는 해 줄 테니 걱정하지 마라.’하고 큰소리를 쳤다.
하지만 저렇게 아름다운 삶을 일궈낸 줄기를 감히 자를 수 있을까?

농부의 그 믿음직한 팔뚝 같은 줄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