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 동가식(東家食), 서가숙(西家宿) 』

일흔너머 2010. 10. 22. 22:32

 

 

해질녘 들판을 바라보는 것은 정말 흐뭇하다.

특히 여행을 하다가 낯선 곳에서 바라보는 일몰은 마음을 가다듬지 못해 안절부절하는 묘한 감정에 빠져든다.

 

이럴 때 아예 조금 높은 언덕에 자리하고 앉아 서산에 넘어가는 해를 바라보라. 마치 살아온 지난날을 되돌아보는 기분일 것이다. 만약 가까이 잠자리를 정해두고 저녁 끼니까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면 더욱 느긋하게 여행의 참맛을 즐길 수 있다.

 

우리는 항상 돌아가야 한다.

흔히 말하는 귀소본능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해거름에 나타난다. 집에 가도 아무 할 일도 없는데 누구나 서둘러 일어나 돌아간다.

 

습관은 묘한 것이다.

언제부터 그런지 정확히 모르지만 집을 잊고 산다. 몇 년 전에 큰딸이 울산으로 시집을 가고 뒤따라 둘째가 영양으로 갔다. 자연히 딸네 집을 들락거리다가 우리 집이 주는 정을 잊어버린 것이다.

 

물론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다.

첫째네 집에 가면 대구 우리 집이 걱정되고 영양 둘째에게 가면 첫째가 걱정되고 속말로 앉아도 걱정 누워도 걱정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몇 년이 흐르니 이젠 여기가 거기 같고 거기가 여기 같다.

 

대구는 더위로 유명한 곳이다.

이번 여름에는 양포 바닷가에 집을 장만하고 그렇게 더웠다는 여름을 쉽게 보냈다. 조금 더웠다 싶으면 집사람과 보따리를 챙겨 달려와 버렸다. 바다가 이래 시원한 줄 처음 알았다며 집사람은 양포 집을 좋아한다.

 

집사람이 며칠 전 정형외과에서 손바닥 신경 수술을 했다.

손 때문에 생활이 불편하여 울산 첫째한테 가서 며칠을 지냈다. 그리고 내일은 친구들과 만난다고 양포로 왔다.

 

양포에는 유명한 「아구탕」이 있다.

집사람과 둘이서 저녁으로 그 많은 탕 한 냄비를 다 비우고 포만한 배만큼 둥근 보름달이 검은 어스름 구름에 휘감겨 숨바꼭질하는 어둑한 바닷가를 걸으며 생각에 잠긴다.

 

두고 온 집에 대한 아무 걱정이 없다.

그저 시원하다. 어쩌다 한두 사람 보이는 낚시꾼에게 관심이 더 있다.

정말 자유롭다.

이러다 옛 사람들 말하는 「동가식(東家食), 서가숙(西家宿)」하는 팔자가 되려는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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