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 구제역(口蹄疫) 』

일흔너머 2011. 1. 20. 13:32

우려하던 일이 현실로 다가왔을 때 느끼는 감정은 사람마다 다 다르다.

우선 남자들은 다소 이성적으로 대처한다. 물론 여자들은 감정이 앞선다. 자신이 직접 이해 당사자가 되었을 때는 그 현상이 더욱 두드러진다.

 

둘째의 시댁에서 많은 한우를 사육한다. 그런데 이번에 구제역이 바로 그 인접한 안동에서 발병을 하고 정말 하루 하루를 노심초사하며 감옥 같은 생활을 해 왔다. 혹시 옮을까 걱정을 하여 집밖으로 나들이조차 삼가고 우사 주위를 매일 소독하며 그렇게 지냈다. 안부를 물으러 한번 찾아가 보고 싶었으나 그것도 위험하다고 해서 걱정을 나누는 전화 몇 번 하는 정도였다.

 

그런데 안동에서 구제역이 발생했다는 뉴스가 나고 달포나 지나 어지간히 잘 견딘다, 이제 숙지막해지겠구나 싶었는데 지난 월요일에 둘째의 전화가 비보를 전했다.

 

기가 막혔다.

집사람은 눈물부터 쏟았다. 사부인도 그랬단다. 사돈에게 위로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전화를 냈더니 본래 활달하고 부지런하며 뚝심이 있는 시골 양반이라 그런지 웃으며 받았다. 역시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아주 차분한 목소리로, ‘지금 어떡합니까. 애를 썼지만 당한 걸 이겨내야지요.’하며 허탈한 웃음을 웃었다. 뭐라고 위로의 말을 하기도 그렇고 많이 들어주는 것이 나을 것 같아서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이번 기회에 잠시 농사를 접고 함께 여행도 하고 그러자며 억지로 위로의 말을 했다.

 

그런데 사돈은 이야기를 하며 아직도 한 가지 억울한 생각이 드는 부분이 있었다. 이웃들의 협조였다. 그렇게 구제역이 돌아 전국이 방역을 한다는 이 마당에 구제역이 처음 돌았다는 안동에서 많은 사람들이 왔다갔다는 것이다. 사돈의 우사가 있는 산에다 장례를 치렀다는 것이다. 아무리 말리고 어쩌고 해도 아직 우리 감정에는 어쩔 수 없는 것이 이런 장례라는 것이다. 그리고 일주일 만에 마을의 소 사백 마리가 묻힌 것이다. 전염병, 즉 역병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실감하지 못한 처사다.

 

소식을 듣고 사위는 바로 일주일 휴가를 내고 집으로 달려갔지만 집 앞에조차 가지 못하고 돌아서야 했다. ‘통제구역’으로 이 주일간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고 나오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침에 둘째가 울며 전화를 했을 때 아무리 시부모님일 지라도 그저 전화로 위로를 하지 가지는 마라고 한 내 말이 결국 이성적으로 맞아떨어진 것이다.

 

만약 위로를 한답시고 시댁에 갔다가 다른 곳에 병이라도 나는 경우 ‘알만한 사람이, 그것도 공무원이 오히려 병을 옮겼다.’고 얼마나 많은 핀잔을 받겠느냐고 절대로 가지 마라 했다. 그랬더니 집사람과 둘째는, ‘어떻게 가지 않느냐?’고 난리를 쳤었다.

 

그러나 이런 경우 정말 이성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예부터 역병은 나라 전체가 흔들리는 경우가 많았다. 이럴 때일수록 모두가 이성적으로 일을 처리해야한다.

자칫 감정으로 대하다가는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도 못 막는 우를 범하게 될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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