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

『 네팔(Nepal) - 신(神)이 살아있는 나라 』---(2)

일흔너머 2011. 6. 14. 23:51

 

             좁은 도로를 용하게 지나가는 운전기술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곧 부딪힐것 같은 주위 오토바이들... ]

 

 

너저분한 쓰레기통 속에서 말끔한 한 알 진주를 발견한 것처럼 어수선한 공항 광장에서 제일 근사하게 서있는 버스를 발견하였다. 바로 우리가 탈 버스였다. 겉모양부터 에어컨까지 어느 정도 수준을 갖추었다는 데서 우선 큰 위안을 삼을 수 있었다. 우리 팀은 모두 열 여섯 명이었는데 버스 정원은 삼십 명이 타고도 남을 넉넉한 공간이었다. 아무렇게나 가방을 둘 수도 있고 맨 뒷자리는 누워서 갈 수도 있었다.


시끌벅적한 공항을 빠져나와 좀 조용한 길을 가는가 싶었는데 어느새 카투만두의 혼잡한 시내로 들어와 오토바이, 자전거, 오토릭샤들로 둘러싸여 울려대는 크락숀 소리에 혼이 빠지고 우리는 금새 네팔 사람이 다된 기분이었다.
가뜩이나 복잡한 길을 평소 우리의 습관과는 반대로 좌측통행을 하니 더욱 불안하였다. 하지만 운전기사는 우리가 감히 상상도 못할 좁은 길을 요령있게 이리저리 몰고 다녔다. 그리고 한참을 가더니 모두 내리란다.

 

 

                [ 사원의 입구에서 볼 때는 좁게 보여도 실제 들어가면 무척 넓은 공간과 여유가 있었습니다... ]

 

보드너드(Boudhanath)사원 입구였다. 보드너드사원은 네팔 최대의 불교사원이다. 정말 이름에 걸맞게 큰 탑을 자랑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처럼 법당이나 요사채 건물이 있는 그런 사원은 아니었다. 탑을 중심으로 둥글게 건물들이 자리하고 있었지만 그 건물들은 모두가 상인들이 차지하고 오직 탑만 남아있는 형편이었다. 집사람과 함께 탑을 돌며 신기한 이국의 사원을 구경하며 부처님 진신사리가 모셔졌다는 말에 한번 더 '아이들 잘 지내라'고 '나의 주위 사람들 모두 행복 하라'고 기도하고 또 기도하였다.


이번 여행에서 자주 겪은 일이지만 네팔, 그리고 인도에서 한국이란 나라가 엄청나게 알려졌다는 걸 실감하였다. 만나는 현지인들 모두가 「코리아?」라고 물으며 함께 사진을 찍자고 청했다. 특히 집사람의 인기가 인도 사람들에게는 무척 높았다. 아직도 궁금한 것이 우리나라 사람 성형수술을 열 번해도 인도나 네팔 사람의 그 아름다운 눈을 흉내내지 못할 것이라고 농담을 했는데 어찌 그 사람들은 우리나라 사람을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그런 걸 보면 아름다움의 기준이 수술로는 따라잡지 못하는 뭔가 있다고 생각된다.

 

 

                [광장에는 기념품을 파는 상인들이 물건을 덮어놓고 있다가 우리가 가자 열어제치고 호객행위를 하였다... ]

 

뜨거운 햇빛을 받으며 한 시간 가량을 보드너드사원의 매력에 흠뻑 젖어 지내다가 좁은 골목을 빠져나와 고대「하누만 도카 (Hanuman-dhoka)」왕국의 흔적이 남은 두르바르(Durbar) 광장으로 갔다. 하누만이란 원숭이를 말한다. 힌두교에서 원숭이는 사람 이전의 신화적 존재다. 그 원숭이 왕국의 흔적이 남았다니 대단한 줄 알겠지만 규모로 이야기하면 아무 것도 아닌 광장이다. 하지만 그 섬세함은 세상에 견줄 데 없는 그런 목조조각들이 빠끔한데 없이 새겨져 있었다.

 

 

               [ 쿠마리가 사는 2층 창가를 올려다 보고 있다. 신비감을 주기위해 그러는지는 몰라도 한 여인의 삶으로는 정말 안스러울 뿐..]

 

광장과 붙어있는 건물이 쿠마리(Raj Kumari) 사원이다. 쿠마리는 살아있는 신이다. 어릴 때 선택되어 신으로 받들어 모시는 여자 아이를 말한다. 십 오세 가까이 되어 초경(初經)이 시작되면 버림을 받는다고 했다. 피를 흘리면 신이 아니라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축제를 제외하고는 얼굴을 볼 수가 없다고 했다. 철저히 베일에 가려져 신비의 세계를 사는 여인. 하지만 우리는 그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단 일 달러를 내고 말이다.

웨렌 버핏과 점심을 먹으려면 몇 천 달러를 내야 한다는데 단 일 달러에 얼굴을 내미는 걸 보면  신의 가치가 너무 비참하지 않은가? 바로 이것이 현존하는 신, 네팔의 현실을 대변하는 것이리라.


그 옛날, 별로 날카롭지도 않은 조각칼을 움켜쥐고 나무와 씨름하였을 네팔의 장인을 떠올려본다. 기둥 하나하나, 창문 하나하나 어디 손 가지 않은 곳이 없다. 지금 그 기둥 아래 네팔의 젊은 청춘남녀는 뭘 소곤대는지? 알지도 못하는 이국 언어를 골똘히 귀띔하는 나는 여기 왜 와서 서 있는지? 돌아보게 된다.


 

                 [ 자그마한 몸인데 저렇게 큰 짐을 지고 가는 사람이 자주 있었다... 업보처럼 둘러매고 가는 기막힌 삶이다. ]

 

그때였다.

뭔가 큰 소리가 나서 깜짝 놀라 한 발 물러서며 돌아보니 자기 몸보다 두 배나 큰 물건을 머리에 끈을 달아 둘러매고 길을 비키라고 고함을 치는 것이 아닌가. 쓸데없는 생각들 하지 마라. 사람 살아가는 현실이 이렇게 '힘들다.'하는 걸 당장에 보여주기라도 하듯 말이다.

 

          

                     [나름의 전통 춤과 음악을 보여주었지만 피곤한 우리는 두 곡을 듣지 못하고 나오고 말았다... ]

 

현지식으로 저녁을 먹었다.
전기 사정이 나쁜 네팔에서 어둑한 식당은 당연하다. 화력발전은 없고 오직 수력발전만 이용하는데 가뭄이 심해서 더욱 사정이 나빠졌단다. 실제 우리가 지내는 삼일동안 서너 번의 정전을 경험하였다.


야트막한 깊이로 파인 초벌구이 도자기 잔이 놓이고 화끈한 네팔의 소주 한 잔이 따라졌다. 목구멍을 넘어가는 감이 좋다. 또 한 잔을 마셨다. 내일을 생각지 않는다면 발뻗고 길게 마시고 싶다. 일회용의 술잔은 초벌구이라 그런지 입술에 착 달라붙는다. 하지만 아직 열흘 넘게 기다리고 있다.
참아야 한다.
네팔의 첫날밤은 참고 또 참고 그렇게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