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름 위로 보이는 설산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뒷 모습을 집사람이 찍었는데 욕심없이 찍어서 더 잘 나온 것 같습니다...]
어제 저녁에 호텔 방을 정할 때 또 냄새가 났다. 아마 누가 에어컨을 켠 상태에서 담배를 피운 모양이다. 구역질이 날 정도로 심해서 어쩔 수 없이 또 방을 바꿨다. 그런데 그 바꾼 방에 모기가 있었다. 호텔 카운터에 전화를 하고 난리를 쳐서야 모기를 잡는 매트를 얻을 수 있었다.
다행히 바꾼 방에서는 창문만 열면 멀리 히말라야의 높은 산들이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어두워지고 낮선 이국의 밤은 그렇게 지나버렸다. 그리고 네팔에서 3일, 사랑코트에서 일출을 본다고 새벽 4시에 일어났다. 새벽잠이 없어졌는지 모닝콜을 받지 않고도 용케 시간을 맞춘다.
집사람과 나는 미리 인터넷을 찾아보고 어두울 것이라 손전등도 준비하고 추위를 대비해서 제법 두꺼운 옷도 챙겼다. 하지만 기우였다. 우리가 타고 가는 버스 앞으로 부지런한 네팔 사람들은 일터로 향하고 있었다. 일출을 보는 「사랑코트(sarangkot) 전망대」는 호텔에서 약 20분 가량 달려가니 버스 한 대가 겨우 지나다닐 산길이 나왔는데 그 산길을 꼬불꼬불 한참 올라서야 만날 수 있었다.
우리의 가이드는 노련했다. 전망대로 올라가는 도중에 차를 세우고 먼동이 트는 히말라야의 그 웅장한 설산을 우리들 앞에 떡하니 가져다 놓았다. 장관이었다. 기가 막혔다. 더 이상 바라볼 것도 찾아볼 것도 없었다. 사랑코트에서 안나푸르나가 어쩌고 피쉬테일이 저쩌고 해도 내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바라보다가 또 사진 몇 장 찍다가 또 주위를 돌아보며 혼이 나간 사람처럼 그렇게 서있었다.
설산을 처음 보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높이로 따져 육천 미터가 되는 산을 처음 보는 것도 아니다. 중국의 서쪽, 천산 산맥의 천지까지 그리고 흔히들 말하는 곤륜산도 봤지만 이런 감동은 정말 처음이었다. 해가 한참 떠오르고 오늘 일정 때문에 버스를 타고 내려오며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어떻게 그런 감동을 주는가? 한참을 지난 후에야 알았다. 전에 보았던 높은 산들은 멀리서 그저 눈 덮인 자태를 보았지만 이번에는 바로 앞을 가로막고 떡 버티고 선 거대함에 기가 눌린 것이었다.
하늘을 향해 눈을 치켜 뜨고서야 바라볼 수 있는 산, 그것이 바로 히말라야라는 것을 알았다. 물론 그것도 운이 좋아야한다. 시시각각 변하는 산악의 날씨는 잠시 머무르는 우리에게 윙크하듯 살짝 한 자락을 걷어 보이고는 다시 다가오는 우기를 대비하여 먹구름으로 덮어버렸다. 생각 같아서는 그 자리에 텐트라도 치고 며칠을 머물며 히말라야를 붙들고 안나푸르나를 바라보며 응석을 부리고 싶었지만 단체여행의 계획된 일정은 조금의 틈도 허락하지 않았다.
사랑코트의 감동을 품고 서둘러 아침밥을 먹었다. 이제 우리는 또 짐을 들고 다음 목적지, 룸비니를 향해 호텔을 떠났다. 부처님 탄생지인 룸비니는 네팔과 인도의 경계지점에 있었다. 차창밖에 보이는 경치는 우리가 큰 계곡을 빠져나가고 있다는 걸 알려주기라도 하듯 외쪽은 그저 암석으로 된 절벽, 오른쪽은 깊은 낭떠러지가 다였다.
TV에서 방영된 '차마고도'에서나 봄직한 아슬아슬한 계곡이었다. 물소등처럼 반질반질한 회색의 강물이 까마득한 계곡 아래로 흐르고 있었다. 히말라야는 거의가 석회암 지대라 물빛이 그렇다고 했다. 물론 이쪽에서 저쪽으로 계곡을 건너는 외줄 다리가 가끔씩 걸쳐져 있었고 우리는 어쩌다 사람이 건너는 광경을 목격하기도 했다.
한참 동안 위험한 계곡을 지나자 제법 아담한 도시가 나왔다.
'무크린' 삼거리라고 했다.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돌아야 룸비니로 가는 길이었다. 인도로 갈 때 다시 이곳으로 돌아 나와 똑바로 가면 인도라고 했다. 가이드에게 심심하니 과일이라도 좀 사라고 했다. 역시 그들의 손은 작았다. 먼 데서 바라보니 바나나를 헤아리고 있었다. 한 사람에 몇 개씩 계산하여 비닐주머니에 담는 것이었다.
그러자 일행 중에 한 사람이 뛰어나가더니 다 엎어버리고 커다랗게 달린 한 줄을 들고 들어오는 것이었다. 가이드는 민망한지 우물쭈물하며 따라왔다. '얼마냐?'고 내가 물었더니 10불이란다. 돈, 만원이다. 이건 우리가 통이 크다는 것보다 그들이 살아가는 처지와 우리의 처지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 바나나 한 줄은 우리 일행 열 여섯 명이 네팔을 떠날 때까지 심심하면 따먹어도 다 먹지 못했다.
룸비니로 가는 길은 멀었다. 비포장 시골길을 한참 달렸다. 그리고 허술한 시멘트 기둥 두 개를 세워 그 위에 누런 페인트칠을 한 아치형 간판이 나왔다. 버스는 그 입구 한편에다 세우더니 다 왔다고 내리란다.
서둘러 내렸다. 현판을 쳐다보니 네팔 글씨가 꼬불꼬불하게 보이고 'Lumbini the fountain of world peace(세계 평화의 샘 룸비니)란 영어가 보였다.
[ 앞에 보이는 길을 따라 한참을 가야 부처님 태어난 곳이 있습니다. 날씨가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
얼른 사진을 찍고 일행을 따라갔는데 버스 안이 얼마나 차가웠는지 카메라 렌즈에 김이 서려 사진이 묘하게 나왔다. 얼른 렌즈를 닦고 다음에 대비했지만 지금 들여다봐도 어떻게 이런 묘한 사진이 나올 수 있었는가 정말 기가 막히는 결과다. 마치 무슨 꿈을 찍은 사진 같다. 가장자리는 일부러 무슨 처리를 한 것같이 흐리게 퍼진 사진이다.
꿈에 나타나는 소는 조상(祖上)을 뜻한다. 그 조상이 마중을 나온다는 것은 언젠가 나는 여기 네팔의 한 사람이었다는 이야긴가? 아니 한 마리 물소라도 좋다. 히말라야 계곡을 흘러내리는 석회암의 회색 물빛은 아리안 족의 피부와 물소의 잔등을 씻어 마침내 룸비니 동산까지 물들였다.
[하얀 건물내부에 부처님 태어난 곳, 마야데비 부인을 기리는 사원임. 그 왼쪽 옆에 아쇼카 석주. 우리들 뒤로 구룡못입니다. ]
역시 불교 유적은 생각보다 검소하다. 이천 오백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면 대단했을 것이지만 지금 바라보는 바 그 위용은 없었다. 말만 듣던 곳을 직접 대한다는 것은 감동 그 자체다. 부처님이 태어날 때의 현장은 건물 내부에 있었다. 그리고 아쇼카 석주, 구룡못, 모두가 상상보다 초라했다. 이슬람교인들이 파괴한 아쇼카 석주는 박물관에 보관 된 것이 더 훌륭했다. 구룡못도 입구에 연꽃이 핀 호수가 더 자연스럽고 컸다.
[ 불교의 성지란 걸 잘 알려주듯 많은 스님들이 찾아오는 곳이 룸비니입니다. 우리는 그 많은 스님과 웃음과 합장으로 인사를..]
돌아올 때 한 무리의 스님들이 우리를 지나갔다. 아마 성지순례를 오시는 것이리라. 집사람이 '나무석가모니불'하며 합장을 하였다. 그러자 한 스님이 집사람을 불러 한국에서 왔느냐고 묻더니 바랑에서 작은 목걸이를 꺼내 주었다. 인연이 맺어지는 순간이었다.
왜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네팔이나 인도 어디를 가나 어린이들이 손을 내미는데 그들에게 줄 캬라멜이나 볼펜 한 자루를 준비하지 못한 것일까? 그저 내게 필요한 옷이나 먹을 것만 생각했지 여행지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전혀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집사람이 이번 여행을 좋아했다는 것이다.
불교 유적지를 갈 때마다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자기가 이런 곳을 다 오다니 그저 꿈같단다. '김 아무개에게 시집을 와서 삼십 년 넘게 살다보니 이런 날도 있구나.'하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날 쳐다보곤 했다.
아, 이럴 때 나는 저 멀리 망고나무 아래 고즈넉이 엎드린 한 마리 물소가 된다.
그리고 가만히 지금껏 살아온 생(生)을 반추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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