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

『 인도(India) - 모든 걸 드러내놓고 사는 나라 』---(7)

일흔너머 2011. 7. 15. 11:13

 

               [ 잔시역, 교통의 중심지답게 규모가 컸습니다. 사람도 무척 많았지만 살짝 비켜서 다소 한가하게 느껴집니다...]

 

'잔시'는 교통의 중심지다.
우리가 역에 도착했을 때는 주위가 제법 어둑하였다. 가이드는 우리를 버스에 남겨둔 채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흔히 말하는 포터(짐꾼)를 데리고 와서 모든 짐을 그들에게 맡겼다. 우리는 귀중품이 든 작은 가방만 가지고 역사로 들어가고 짐꾼들이 큰 가방을 들었다. 아니 들었다는 말보다 머리에 이었다.

 

짐꾼들은 평소 두루마리 천을 어깨에 두르고 다녔다. 땀이 나면 그 천으로 닦고 짐을 질 때는 동그랗게 똬리를 말아 머리에 얹고 짐을 이었다. 짐꾼 한 명이 엉거주춤하게 앉으면 다른 동료가 머리 위에다가 커다란 가방을 한 개, 두 개, 또 한 개……이렇게 포개 얹었다. 운이 없는 짐꾼은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남보다 한두 개 많은 짐을 이고 헐떡거렸다.

 

               [ 모두들 처음 보는 짐꾼의 재주에 놀라 바라보고.. 저렇게 많은 짐을 들고도 그 더운 날씨에 아무렇지 않다는 듯.]

 

거기다가 또 팔에는 가방손잡이를 늘여 양손에다 끼운다. 결국 짐꾼은 가방으로 온 몸이 둘러싸이게 된다. 자그마한 몸이 더 작게 보인다.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나오고 요즘 흔히 이야기하는 달인이란 생각이 선뜻 머리를 스친다. 이건 서민(庶民), 아니 천민(賤民)의 삶이다. 아니 삶이 아니라 생존이다. 이 땅에 그저 한 몸 부지(扶持)하려는 애처로운 발버둥 말이다.

 

어둠이 내리는 '잔시'역에는 여행객들로 붐볐다.
많은 짐을 놓고 둘러앉은 여행객들을 보며 철도가 발달한 인도에서는 기차여행을 많이 하는 것을 느꼈다. 우리가 탄 열차는 잔시가 시발역인 특급열차였다. 속도는 물론 에어컨도 시원하게 잘 나왔다.

 

               [ 비닐봉지에 든 마더 데일리라는 유제품회사 요그르트 '라슬'입니다. 승객에게 나누어 주는데 맛이 정말 좋았습니다...]

 

그리고 신기한 것은 열차 안에서 벌이는 서비스였다. 그 많은 승객들에게 비행기에서나 하는 그런 식사와 간식을 물과 함께 순식간에 가져다 주는 것이었다. 그것도 몇 안 되는 역무원이 말이다. 어디까지 음식을 주었고 또 어디부터 다시 주어야 한다는 걸 잘도 기억하고 더 달라는 사람에게는 무엇을 더 가져다 주어야 하는지를 하나하나 기억하는 것이 참 신기하였다.

 

좌석은 우리와 달리 가운데 복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좌석이 다섯인데 둘과 셋으로 나눈 곳에 복도가 있었다. 집사람과 나는 좌석이 떨어져 여행기간 중 처음으로 헤어져 있었다. 옆에는 젊은 청년이 앉았고 복도를 건너 약간 나이가 든 인도 부부와 딸이 앉아있었다. 그러니까 한 가족이 앉아있는 사이에 끼어 가족의 친목을 방해하고 있는 상태가 되었다.

 

어디나 그렇지만 딸은 엄마와 친하다. 아들은 아버지와 친해야 한다. 하지만 남자들이란 말이 없다. 그저 지긋이 바라보고만 있다. 다행히 이 가족도 그랬다. 다행이란 것은 내가 그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끼었으니 말이다.

우선 아버지에게 말을 건넸다. '어디로 가느냐?'부터 '몇 살이냐?' '가족이 행복해 보여 좋다'는 둥 혼자 너스레를 떨었다. 인도 사람들은 수염을 기른 탓에 무척 늙어 보인다. 그런데 보기보다 그 아버지는 젊었다. 나보다 여섯 살이나 아래였다.

 

한참 후에는 제법 친해졌다. 옆에 앉은 아들에게도 말을 건넸다. 유창한 영국식 영어다. Why not?(낫)이 아니라 '놋'이다. 토목건축학을 전공한 대학생이었다. 도시로 나가 큰 회사에 취직을 하면 부모를 모시겠다며 효심이 대단했다. 여행을 하며 현지의 사람과 함께 얘기를 나누며 기차여행을 한다는 것은 정말 행운이었다. 우선 말이 통한다는 것, 현지 인이 우호적이라는 것, 지금껏 여행을 하며 이런 경우는 없었기 때문에 더욱 감동적이고 즐거운 여행이 되었다.

 

가이드는 인도 사람들의 생활상을 이야기하면서 지나가는 말로 인도에서는 한번 결혼하면 결코 이혼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내가 웃으며 '그런 경우가 어디 있느냐? 매스컴에서 인도의 결혼 풍습을 봤는데 여자에게는 아무 권리가 없고 부모가 하라는 대로하던데 뭘 그럴까?'하며 빈정대었다. 그랬더니 가이드는 인도 여자들의 발을 잘 살펴보라고 했다.

 

그리고 그 발에 끼고 있는 가락지를 가리켰다. 발에 끼는 반지는 결혼을 할 때 남편이 해준다고 했다. 결혼한 여자는 가락지를 마음대로 뺄 수도 없단다. 그리고 그 가락지는 걸을 때마다 약간의 고통이 여자의 가슴으로 전해진단다. 발가락에 낀 가락지의 고통스런 진동이 남편을 생각하게 만든다는 이야기다.

 

              [ 이 사진을 찍는데 정말 어려웠습니다. 따라가며 찍다가 도저히 안 되어 결국 허락을 받고 발만 찍을 수 있었습니다.]

 

한편 멋진 발상이고 또 한편 슬픈 사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하는 사이라면 이보다 더 멋진 발상이 또 어디 있을까 잠시도 잊지 않고 그 사랑을 떠올리게 만드는 장치. 하지만 싫어하는 사이라면 한시라도 잊고 싶은 남편에게 종처럼 매여 있는 사슬이 되지 않는가? 정말 비인간적이고 슬픈 사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알기로 인도의 열차는 연, 발착을 밥먹듯 한다는데 특급열차라 그런지 정확히 '아그라'에 도착하였다. 탈 때와 마찬가지로 짐꾼은 우리들의 그 많은 짐을 예의 그 화려한 기술(?)로 이고 들고 와서 버스에 실어주었다.
나는 그 수고비가 궁금했다. 가이드에게 저들이 저렇게 힘들여 운반하는 비용이 얼마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차마 입에 담지 못했다. 혹 돌아오는 대답이 너무 비참한 그들의 현실을 들여다보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밤 10시가 되어 호텔에 도착한 우리는 정말 늦은 저녁을 먹었다.
이미 열차에서 주는 야릇한 음식으로 이미 허기를 때워 그런지 배는 고프지 않았지만 그래도 주면 먹어야 한다. 함께 하는 여행의 기본조건이다. 언제 어디서나 손가락으로 가리키면 보고, 얘기를 하면 들어야한다. 그리고 주면 먹고 화장실이 보이면 짜서라도 비우고 침대가 있으면 무조건 몸을 뉘어 눈을 붙여야한다.
어차피 매인 몸, 단체여행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