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장 한가운데에다 제법 너른 무대를 마련해 두고 노래하고 구경하고 마시고 떠들고, 장꾼보다 구경꾼이 더 많았습니다. ]
우리나라에서 제일 한가한 기찻길,
중앙선을 달렸습니다.
동대구 역에서 아침 여섯시 이십분에 출발하는 비둘기호를 타고 정선 5일장을 찾아간 겁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더니 정말 맞는 말이었습니다. 여태 가을 가뭄이 심해서 걱정을 했는데 우리가 정선 5일장을 구경하러 간다고 정한 22일은 전날 밤부터 여름처럼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결국 새벽에는 아주 대놓고 퍼붓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걸어도 될 거리를 차를 타고 가서 주차를 해두고 다시 택시를 탔습니다. 예보에는 오전 중에 갠다고 했습니다. 설마 우리가 도착할 정오쯤에는 우산 없이 단풍도 보고 장구경도 할 것이라 기대를 했습니다.
하지만 강원도 통리역까지 가는 네시간 동안 창밖에 뿌리는 가을비를 보면서 일행과 술이나 마시는 길밖에 다른 할일이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아침밥을 거의 먹지 못한 상태라 달리는 창밖의 풍경을 보며 가지고 간 김밥에다 떡에다 맥주를 마시며 시름없이 내리는 비를 탓하며 한적한 가을 풍경을 보았습니다.
다만 비가 오지 않았다면 햇빛에 눈이 부실지경인 절정의 단풍을 볼 수 있었을 것인데 그것이 아쉬웠습니다. 대략 점심때가 되어서 통리역에 도착하여 우리를 기다리는 버스에 올랐습니다. 버스는 생각보다 얼마 가지 않아 정선의 그 유명하다는 5일장에 우리를 내려놓았습니다.
[ 아라리촌에서 바라본 정선 시장, 조양강 건너 차들이 가득 찬 강변 주차장이 보이고 가운데 흰 건물이 재래 시장입니다. ]
한마디로 대단했습니다.
강변에 아주 널찍한 주차장을 만들었는데도 혼잡하기가 이를 데 없었습니다. 대략 대형관광버스가 스무남은 대였으며 일반 승용차는 셀 수도 없을 정도였습니다. 다들 소문을 듣고 빗속을 뚫고 찾아온 것입니다. 하긴 굼뜨기로 소문난 나 같은 사람이 다 찾아오는데 다른 사람이야 오죽할까 생각하면 이것도 적은 인파일 것입니다.
경찰이 나와서 곳곳에 교통정리를 하고 난리였으며 우산을 쓰고 잠시 걸으니 시장이었습니다. 북적대는 인파가 보였습니다. 시장까지 가고 오고 하는 것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밀려가고 밀려오는 것이었습니다. 거기다가 거지같은 엿장수는 꽹과리에다 북을 치며 법석을 떨어서 사람의 혼줄을 쏙 빼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비가 추적대고 아무리 주위가 시끄러워도 구경이란 배가 불러야 구경이 눈에 들어옵니다. 친구들과 어울려 강원도를 여행하며 몇 번이나 기회가 있었어도 먹어보지 못한 [올챙이 국수]와 [콧등치기]를 이번 기회에 먹어보려 합니다.
[ 모둠전, 메밀 부침개부터 수수 노티 그리고 감자전 등이 한꺼번에 담긴 한마디로 메밀과감자로 만들 수 있는 모든 전.. ]
정선에 오면 숨이 찬 노인이 토해내는 구성진 정선 아리랑을 듣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건 우리 같은 늙은이가 바라는 것입니다. 요즘 젊은이는 싸이키 조명에 단조로운 타악기로 두드리는 난타가 그들의 음악입니다. 어딜 가나 그렇습니다. 아마 정선 아리랑을 부를 정도의 실력을 갖추지 못하거나 노력이 귀찮아서 그러는지 모르겠다고 나름 생각해 봅니다.
[ 올챙이 국수, 옥수수 가루로 끓이다가 찬 물에 흘려보내 마치 올챙이처럼 보인다고 해서 ... 하지만 색깔이 영 아니었다. ]
일행과 함께 가장 번잡한 가게에 둘러앉았습니다. 그리고 여기 있는 모든 메뉴대로 다 맛보게 해 달라고 주문을 넣었습니다. 마침 「모둠전」이란 것이 있어서 편리했습니다. 거기다 점심 요기가 되도록 각자 취향대로 올챙이 국수와 콧등치기를 알맞게 주문을 했습니다. 물론 큼직한 병에 넉넉하게 들어있는 막걸리 한 병도 잊지 않고 말입니다.
[ 콧등치기, 메밀국수로 먹을 때 후루룩 빨아당기면 콧등을 친다고... 건강에는 좋으나 맛은 별로였습니다...! ]
아무리 시끄러워도 그 소음은 간간이 쉬는 법입니다. 또 스스로 시끄러우면 주위가 얼마나 시끄러운지 모르는 법입니다.
비는 촉촉이 내리겠다, 또 주위는 시끌벅적 하겠다, 먹고 마시고 떠들기 좋았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점심은 난장판에서 보기보다 거나했습니다.
한참을 그렇게 요기를 하고 나니 이제 주위가 보이고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 지 관심이 갔습니다. 내 배가 불러야 이웃 사정도 살핀다는 뭐 그런 거지요. 시장은 여느 시골 장처럼 작았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미여터질 지경이었습니다. 이것이 다 매스컴의 힘이었습니다. 매2일 7일 두 장날은 항상 이렇답니다.
특별히 살 물건도 그렇다고 팔 물건도 없는 우리는 한바퀴 둘러보고 난 뒤에 돌아오는 기차에서 먹을 감자떡과 과일을 챙겼습니다. 그리고 대략 십 여분 달려 조양강 건너편에 잘 정리된 '아라리 촌'이란 곳을 갔습니다.
오대산에서 발원한 송천과 중봉산에서 시작한 골지천 두 강물이 어우러지는 곳이 바로 강원도 사투리로 '아오라지'.
이곳에는 옛날 사랑하던 처녀 총각이 싸리골 동백을 따러 가기로 약속했으나 간밤에 폭우로 물이 불어나면서 만나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아우라지 뱃사공아 날 좀 건네주게. 싸리골 올동박이 다 떨어진다.'는 정선아리랑, 그 아오라지 물이 흘러 정선읍을 휘돌아 가는 조양강입니다.
아라리 촌에서 우산을 쓰고 한창 절정에 이른 가을 단풍이 촉촉이 젖은 풍광을 보는 것도 또 다른 정취가 있어 무척 좋았습니다. 통리역으로 돌아오는 길에 몰운대, 화암 약수 두 곳을 더 들렀습니다. 하지만 단풍이 한창인 소금강의 풍경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금강산을 축소해 놓은 것 같다고 하여서 소(小)금강이라 한다니까 가히 그 경치를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이슬비가 내리는 계곡, 작은 출렁 다리를 건너면 약수터입니다. 시원한 약수 한잔 마시고 정신을 차려 봅니다. 단풍이 바람에 흔들리는 계곡에는 많은 사람들이 야영을 하고 있었습니다. 값비싼 외제차들이 멋들어진 천막을 싣고 와서 심지어 바닥에는 전기까지 들어오도록 꾸미고 야영을 즐기는 것입니다. 다들 잘 삽니다. 젊은 날, 그 무거운 텐트를 메고 올라가 추위에 떨던 기억을 하면 정말 부럽다는 생각이 납니다.
아무리 즐거워도 여행은 결국 돌아가야 합니다.
통리역에서 한참을 기다려 어둑한 플랫폼에 괴물처럼 미끌어져 들어오는 밤 기차를 탔습니다.
기차 여행의 가장 취약점은 밤입니다. 아무 변화 없는 깜깜한 차창을 바라보다가 그저 조는 것이 답니다.
이럴 때 친한 사람과 함께 하면 두런두런 사는 이야기를 나누면 여행의 즐거움이 극에 달합니다. 화제는 물론 호사스레 사는 것이 아닌 아들이 어쩌고 출가한 딸자식이 어쩌고 하는 그런,
그저 옛 이야기의 끝자락에 나오는 것처럼 「 아들 딸 낳고 잘 먹고 잘 살았다」는 이야기면 됩니다.
원래 여행이란 내가 살거나 다른 사람이 살았거나 다 사람 사는 걸 보고 느끼려고 하는 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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