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 금붕어 』--- (2)

일흔너머 2008. 4. 7. 08:39

 

말짱한 정신에 그따위 빈정거리는 말을 들었다면 시비가 붙어도 한참 붙었거나 주먹다짐이 일어났을 것이다. 술 좋다는 것이 이런 경우인가. 서로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으르렁거리다가 이내 뜻이 통했다. 술이란 역시 혼자 마시는 것보다 짝이 있어야 흥이 난다. 합석을 했다. 거무튀튀하게 찌든 노무자들 얼굴과는 달리 얼핏 봐도 표정이 밝고 잡티가 없어 호감형이었다. 거기에 약간 비스듬히 쓴 헌팅모는 그를 더욱 교양 있고 곱게 늙어 가는 오십 중반의 인텔리로 보이게 만들었다.
사내는 잔을 건네며 동의를 구했다.


"막걸리란 본시 주전자에 담겨 있어야 하는 거여…….언제부턴가 이게 플라스틱 통에 들어가더니 맛을 버렸어. 안 그래여?"
"그래도 그게 어디……? 세상 편하자고 바뀌는데 제 놈이라고 버틸 수 있습니까? 그리고 그릇이야 변해도 술은 안 변하듯이 사람 사는 세상은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암 안 변하고 말고……, 자 자 한 잔……."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하듯 반갑게 술잔을 건네며 일부러 굵직한 목소리로 사내의 잔에다 넉넉하게 따뤘다. 처음에는 달팽이 촉수가 밖으로 머리를 내밀 때처럼 서로가 서로를 경계했다. 하지만 잔이 두어 순배 돌자 연배도 비슷한데다 두 사람의 소탈한 성격이 서로에게 호감을 가지게 했는지, 때마침 찾아온 중년이란 나이와 시린 등이 쉽게 서로의 마음을 열게 했는지 모르지만 오랜 친구보다 더 잘 통했다.
'박영호', 청계천에서 화공약품상을 하는 그는 고향이 경상도 '김천'이라 했다. 말끝마다 '여'자를 붙이는 사투리에서 고향내를 풍겼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서울로 공부하러 올라온 것이 그만 이렇게 눌러 산다고 했다. 온갖 이야기가 술안주가 되어 말없이 앉아있던 평소와 달리 만취가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물론 다음에 또 만나자는 허드레 약속을 남긴 채.


그런데 세상 인연 묘한 것이다. 술집에서 일주일 전에 만났던 그 박 선생을 엉뚱하게 종로에서 만났다. 물론 처음에는 몰랐다. 어디서 본 듯하다는 박 선생의 어쭙잖은 표정을 보고 한참 기억을 더듬어 알아낸 것이다. 박 선생은 머리에 띠를 두르고 요즘 많이들 하는 바로 그 집단농성을 하고있었다.
"김형이 웬 일로……."
"아니 박 선생님이 웬 일로……."
아마 거의 동시에 놀라고 거의 동시에 안부를 물었던 탓에 대답은 아무도 하지 못 했다. 한 사람은 대열 밖에서 한 사람은 대열 안에서 서로 손을 흔들며 이런저런 인사말을 건넸지만 시끄럽게 외쳐대는 구호 탓에 서로 알아듣지 못했다.
"가까운 곳에 가서 시원한 음료라도 한 잔……."
박 선생이 고함을 질렀다.
"아? 예, 그게 좋겠네요."


큰 소리와 함께 고개를 끄덕이자 박 선생은 대열에서 나왔다. 그리고 '사투'라고 붉은 글씨가 힘있게 씌어진 머리띠를 풀어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대열을 뒤로 하고 걸었다. 창호는 박 선생이 왜 거기 끼어 있었는지 묻지도 못하고 영문도 모른 채 말없이 뒤따랐다. 한참을 가다가 슈퍼에서 캔 음료를 두 통 사더니 뚜껑을 따 건네며,
"웃기지요? 김형, 내가 생각해도 이런 짓을……"
박 선생은 자신이 보여준 민망스런 모습 탓인지 끝내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심상찮은 분위기에 묻혀 터벅터벅 노숙자들이 모여 있는 서울역 광장까지 오게 되었다. 창호는 매점에서 맥주 두 통을 사 광장 경계에 설치된 기다란 철책에 걸터앉으며 박 선생에게 건넸다.
"김형, 나 원래 세운상가에서 화학용품 파는 것 아시잖소?"
맥주를 한 입 크게 마시고 박 선생은 입을 떼었다.
"아, 예……,얘기했지요."
"이번에 철거 대상이거든……. 그렇다고 내가 무슨 특별한 보상을 바라는 것은 아니고."
"……."
창호는 박 선생을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김형은 잘 모르시겠지만 단체 행동이니까 빠지면 이웃에 욕을 먹고 알게 모르게 따돌림을 당하거든요. 그렇다고 아까 그 사람들 모두 돈 때문만은 아닙니다."


박 선생 말을 굳이 다 듣지 않아도 세상 살 만큼 살아온 창호다. 이 정도는 이미 알고 있는 일이었다. 무엇이든 뭉쳐서 단체를 만들면 힘이 나는 것이 요즘아닌가. 단지 전날 취중에 하던 박 선생 주장대로라면 그래도 팔을 흔들며 내세울만한 명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창호의 생각이다. '무슨 명분으로 그랬느냐?'고 대놓고 묻고 싶었지만 풀죽은 박 선생을 보고 차마 그러지 못했다. 넘어진 사람을 짓밟는 것은 도리가 아닌 것 같았다. 그런데 박 선생은 이미 창호의 속을 꿰뚫고 있었다. 변명처럼 호주머니에서 오래 지니고 다녀 구겨진 A4용지 두어 장을 내 놓았다. 프린트되어 있는 종이의 글씨는 창호의 원시안으로 팔을 쭉 뻗어야 읽을 수 있을 만큼 작았다. 눈을 찌푸리고 종이를 뒤적여서 군데군데 빛 바랜 글씨를 억지로 읽어 내려갔다.
「요즘 아파트에 설치된 버튼 식 자물쇠에 지문감식 스프레이를 뿌리면 매일 누르는 버튼 자국이 드러나 비밀번호를 알 수 있다는데……중략
그거 어디서 팝니까?……성분과 제조법을 알려주시면 합니다. 물론 절도를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건 아주 간단한 원립니다.
성분은 [인테로생트]인데 사람 지문에 있는 유기물을 접촉하면 까맣게 변하는 겁니다. 제조법은 생물학번호 2345번인 [인테로생트]인데 그것을 수소가스와 혼합하여 사용하는 겁니다. 제조는 캔 제조 공장에 의뢰하시면 되고 원재료는 세운상가일대의 화학용품 판매상에.……중략
참, 절도를 하시려면 저희 집은 카드 식이니 다른 집을 알아보세요. 안녕^^」
뭔 소린지도 모르고 빛 바랜 종이를 뒤적이는 창호에게,
"이게 현실입니다. 우리 상가에 오면 안 되는 일이 없습니다. 중학생이 이 정도면 경제적 측면을 떠나 우리 사회 밑바닥에 깔려 있는 민족의 저력이라 해야 합니다. 외국 사람들이 고장나서 고치지 못하는 것도 청계천의 기술은 쉽게 해결하는 겁니다. 이걸 우리의 높은 분들이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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