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루하고 후텁지근하던 늦마가 끝나고 오랜만에 화창한 날, 공사장 인근 빈터에는 그 동안 햇빛을 보지 못하고 웃자란 호박잎이 갑자기 내려 쬐는 햇살에 맥없이 축 처져버렸다. 흔히들 봄이 되면 별 볼일 없는 개똥밭 가장자리에 구덩이를 파고 에멜무지로 호박씨를 묻어 놓는다. 까짓 호박이 열리는 건 기대하지 않는다. 한여름 입맛 없을 때 보드라운 잎사귀 따먹는 것만도 어딘가. 아무리 가풀막지고 후미진 곳에 천덕꾸러기같이 내팽개쳐도 좋다. 저 혼자 누웠다 일어났다 피었다 시들었다하면서 한해가 다하는 늦가을에는 누렁덩이 호박을 남몰래 감춰놓았다가 넝쿨이 걷힐 때 뜻밖에 드러내놓는 것은 마치 속 깊은 사람 같다.
왁자지껄한 주위의 인기척에 눈을 떴다. 김씨와 함께 점심을 먹고 잠시 눈을 붙인다는 것이 그만 오후 두어 시간 늘어진 모양이다. 선잠 깬 탓이라 정신이 아득하였다. 그 때 낯선 사투리가 귀에 쨍하게 거슬렸다.
"오메, 지금 뭣들 한다냐? 싸게싸게 일어들 나아. 일당은 해야지이이."
갑자기 들리는 남도 사투리에 놀라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그늘을 찾아 누웠는데 어느새 아랫도리 절반은 햇빛에 나와 있었다. 온몸이 땀으로 후줄근하게 젖어 지나는 소나기라도 한바탕 맞은 것 같았다. 김씨도 마찬가지지만 평생 안 하던 막노동판을 구르다보니 요즘은 건강이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져 있었다. 요즘같이 일당 근로자들이 줄지어 있는 판에 쫓겨나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었다. 겨우 몸을 추스른 나는 오전에 나르던 벽돌을 나르기 시작했다.
"젠장, 캄캄한 교도소 감방에서 그렇게도 원하던 게 세상 햇볕인데 이젠 조금 덥다고 피하는구먼, 더럽고 간사한 게 인간이라 더니……."
김씨는 옆에서 겨우 들릴 듯 말 듯한 작은 목소리로 투덜댔다. 요즘 들어 김씨는 혼자 중얼대는 습관이 부쩍 늘었다. 특별히 누구를 탓하는 말도 아니고 그렇다고 누가 들어주길 원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혼자만의 넋두리를 하는 것이다. 물론 전부터 그런 습관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 좋던 재산 순식간에 거덜내고 생각도 않던 전과자 신세까지 되면서 생긴 버릇이다. 사람 일 한치 앞을 모른다더니 김씨가 그랬다. 가족들과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살 때야 건축 노동판의 막노동꾼이 되어 바람처럼 떠도는 신세가 될 줄 누가 알았을까.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을 버리고 혼자 이곳 광주까지 오게될 줄이야 아무도 몰랐다. 처음에는 가족들이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몰랐단다. 전화통을 붙잡고 밤마다 울기도 참 많이 울었단다.
그러나 모든 것을 잃고 어쩔 수 없는 김씨로서는 이 모든 것을 그저 참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가족들을 생각하고 사랑할수록 김씨의 가슴만 타들어 갔다. 「사랑하는 사람은 헤어질까 두렵고 미워하는 사람은 만날까 두려우니 사랑하는 사람도 만들지 말고 미워하는 사람도 만들지 말라」는 부처님 말씀이 비로소 가슴에 다가왔다. 종교란 주위에서 아무리 간곡하게 권해도 배부를 때는 눈에 신이 보이지 않는다. 곤궁에 빠져 스스로 허덕여봐야 비로소 원(願)이 생기고 붙잡고 헤어나고 싶은 믿음이 솟구치는 것이다. 김씨도 마찬 가지였다. 가족들이 간절히 보고 싶을 때는 평소 쳐다보지도 않던 절에도 가보고 부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빌어도 보았다.
그리고 가족을 잊고 지내자 다짐하며 독한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쉬운 게 아니었다. 낮에는 그런 대로 고된 일 때문에 잊고 견딜 수 있다 하더라도 밤이 문제였다. 결국 눈에 밟히는 가족들을 잊고 싶을 때마다 한번씩 감던 눈깜짝이가 이젠 아예 버릇이 되고 눈만 아니라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버릇까지 생겼다. 이런 김씨는 어디를 봐도 건축 노동판의 막벌이꾼으로는 어울리지 않았다. 거기다가 흠씬 큰 키에 가녀린 몸매, 자그마한 손, 어딘가 우수에 젖어 겁 많게 생긴 눈은 전과자라는 말이 당치 않았다.(2003. 08.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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