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 뭐, 다른 것 없나? 』

일흔너머 2009. 12. 29. 11:21

 

살아오며 나는 지금껏 다른 것 뭐 없나하고 한눈을 팔았다.


사범대 출신은 무조건 학교에서 교사로 4년이란 세월을 의무 복무를 해야한다는 규정이 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사범대학은 수업료를 면제받는데 그 면제받은 수업료를 반환해야 한단다. 요즘 같이 취직이 안 되는 세상에서는 어떻게 하든 채용되면 좋은데 하고 의아해 하겠지만 그때는 달랐다. 격세지감을 느낀다.


나라가 경제개발 5개년 어쩌고 하면서 구석구석에 사람이 필요했는데 그 필요한 만큼 교육받은 사람이 없었던 탓이다. 그래서 사범대학을 졸업한 우수한 인재들은 일반회사로 빠져나가 버리니 궁여지책으로 그렇게 못을 박아두었던 것이다.


말이 났으니 하는 말이지만 모두가 어려운 경제환경에서 대학은 아무나 가는 곳이 아니었다. 아무리 머리가 좋고 공부를 잘해도 그 4년이란 오랜 시간 투자하지를 못했던 것이다. 얼른 공부하고 얼른 효과를 봐야했던 것이 그때 상황이었다. 그래서 다들 상고나 공고를 갔다.


다만 사범대학은 달랐다. 수업료가 면제되어 돈 적게 들겠다, 졸업하면 바로 발령 받아 그럭저럭 살림을 꾸리고 크게 남에게 손가락질 받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어지간한 집안의 머리 좋은 인재들은 거의가 사범대학으로 진학을 했다.


물론 경쟁도 치열했다.

하지만 이들은 대학을 진학한 후 항상 뭐 다른 것 할 것 없는가를 살피고 한 눈을 파는 것이었다. 어떤 녀석은 학교 들어오자마자 사법시험 준비를 하고 어떤 녀석은 자격증 시험 준비를 해서 일반 회사로 떠나는 것이었다. 틈만 나면 선생 안하고 도망갈 궁리를 해 대는 것이었다. 

 

그때 선생 대우는 초등학교도 안 나온 일용직노동자(노가다)보다 못했다. 친구가 울산에서 목수 보조(디모도)를 했는데 나보고 그만 치우고 자기를 따라다니라면서 내가 받는 봉급의 세배를 주겠다고 까지 했을 정도다. 그 말을 들을 당시 정말 자존심 있는 대로 구겨지고 속이 상했다. 그 후로 나도 한 눈을 팔기 시작했다.

 

그러나 막상 뭔가를 해 보지는 않았다.

천생 선생밖에는 할 수 없는 소심한 내 마음도 마음이지만 그저 이것으로 만족하고 살자는 안주의식이 강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저께 잔치에 갔다가 같이 근무한 동료교사를 만났다. 퇴직을 하고 택시기사를 한단다. 남들은 다 연금만 해도 사는 것이 어렵지는 않을 것인데 뭐 하려고 그런 짓을 하는가 하겠지만 나는 이해가 되었다. 꼭 돈을 벌려고 하는 짓은 아닐 것이다. 하루에 회사납입금 8만여 원을 다 못 채워서 몇 만 원을 자신의 돈으로 보태어 낸단다.

 

그러나 살면서 못해본 다른 무엇을 해보고 싶었을 것이다. 매일 학교 울타리 안에 갇혀 살던 그 구속에서 벗어나 날개짓을 훌훌 해보고 싶었을 것이다. 마음에는 나도 그런 택시 운전을 하고 싶다. 하지만 그것은 마음뿐이다. 그저 혼자 생각해 보는 것이다. 해보면 좋겠다는 그런 상상 말이다.

 

그러나 용기 있는 그는 결국 마지막 한눈을 팔고 있는 것이다.

가상하다. 그의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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