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좀 깁니다.
좋은 안주거리가 있으면 한 잔 술이 생각나듯 맛있는 음식을 대하면 떠오르는 친구가 동해안 울진 원전에 근무하는 아들을 보러 갔다가 겨울철 별미인 물메기를 사 왔습니다. 요리를 잘하는 친구 식당에다 맡겨서 저녁을 먹었습니다. 그러잖아도 어떻게 무슨 건수가 없을까 기다리던 참인데 맛있게 먹고 마시고 결국 늦게 집사람이 운전을 해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날이 새면 영양 둘째네 집으로 가서 손녀를 돌봐주어야 하기 때문에 보따리를 싸두고 잠을 청하며 TV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울산 사는 첫째가 급하게 전화를 했습니다. 아주 다급한 목소리로 둘째가 울면서 전화를 했다는 겁니다. 손녀가 열이 나고 경기를 해서 영양병원에서 구급차를 타고 안동으로 가는 중이라는 겁니다. 어차피 내일이면 갈 것이지만 상황이 그렇게 미룰 지경이 아닌 것을 직감하고 얼른 옷을 챙겨 입었습니다.
아침에 가면서 기름을 넣어도 되지만 미리 넣어두는 것이 편할 것 같아서 차에 기름을 가득 넣어둔 것이 그래도 다행이었습니다. 안동까지 고속도로를 달려 성소병원 응급실까지 가는 것이 어찌나 멀게 느껴졌는지 모릅니다. 가까이 사는 사돈은 내외가 근심스런 얼굴로 손녀를 돌보고 있었습니다. 아이는 고열로 우리가 가도 관심을 보이지 않고 그저 주기적으로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이러다가 무슨 큰일이 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습니다. 의사와 간호사는 걱정하는 우리를 안심시키며 자주 열을 재고 상태를 관찰하였습니다.
시골 병원의 환자는 대부분이 노인이고 그것도 거의 구십 퍼센트는 안노인들입니다. 몇 시간이 지나 새벽 두시쯤 병실을 얻어 아이를 옮겼습니다. 어지간하면 1인실을 얻으려 했으나 환자들로 넘쳐나 결국 4인실로 입원을 했습니다. 그러니 병실은 좁은데 보호자가 여섯이 있기가 거북하여 사위와 함께 물건도 챙기고 집단속도 하고 겸사겸사 다시 영양으로 왔습니다. 그리고 아침에 안동 병원으로 갔을 때는 다행히 1인실로 옮겨져 있었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손녀의 병이 혹 다른 아이에게 전염될까봐 일부러 그랬던 것 같습니다.
이튿날도 조금은 좋아졌지만 체온이 여전히 오르락내리락 하는 걸 보면서 사위와 딸이 함께 있으니 그래도 어느 정도는 안심이 되어 우리 부부는 영양 딸의 아파트로 돌아와서 쉬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밤이 늦은 시간에 전화를 했더니 또 심해졌다는 겁니다. 우리는 부랴부랴 다시 안동으로 밤길을 달려갔습니다. 어제와 같은 상황이 재연되고 있었습니다.
집사람은 지금이라도 구급차를 타고 대구로 나가서 더 큰 병원에 옮기는 것이 어떠냐고 했습니다. 그리고 다들 날 쳐다보며 판단을 내리길 원하는 눈치였습니다. 수액주사도 해열제 약도 시간 맞춰 먹고 있는데 시원하게 열이 내리지 않았습니다. 정말 이런 경우 제일 난감합니다. 결정을 해야하는 것입니다. 기가 막혔습니다. 한참을 생각하다가 아내를 설득했습니다. 지금 이 밤중에 옮기는 것은 오히려 더 나쁜 상황을 가져올 수 있다. 그러니 기다려 보자.
그리고 답답한 마음에 간호사를 불렀습니다. 영양에서 겪었지만 아이들의 경우 간호사가 정말 중요합니다. 가느다란 혈관을 찾아 한번에 수액주사를 놓을 수 있는 숙달된 간호사는 고통을 덜어주거든요. 성소병원의 간호사도 그랬습니다. 요즘 TV 프로에서 흔히 말하는 '이-뻐(예뻐)'였고요. 거기다가 침착해서 당황하는 우리들을 다독이는 것이었습니다.
약도 주사도 충분히 시간에 따라 챙기고 있는데 이렇게 열이 내리지 않으니 걱정이라며 그러나 너무 많은 약을 투약하면 저체온증이 오는데 그것은 더 위험하다는 겁니다. 「결국 열이란 시간과의 싸움이다. 그러니 기다려야 한다.」 그러면서 아이가 떨고 있는 것을 보고는 고온에 추워서 떠는 것은 열이 오르는 두 번째 단계라며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아이를 덮어주고 땀을 흘리게 하는 것이 낫다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그래 참고 기다리자. 의료진들도 손놓고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잖아. 점점 믿음이 가고 오히려 아이를 벗기는 해열 방법을 떠나 옷을 입히고 땀을 흘리게 만들었습니다.
흔히 이야기하는 무통(無痛) 시간, 밤새 앓다가 날이 밝으면 그 통증이 씻은 듯 사라지는 시간, 대체로 오전 10시 정도를 말하지요. 아침밥이 나오고 의사의 회진이 있기 전에 손바닥만한 팩에 든 수액을 놓는 것이었습니다. 그 작은 팩에 든 해열제를 맞은 아이는 정말 평화롭게 잠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한번도 열이 더 오르지 않았습니다. 짧은 하룻밤이었지만 모두가 걱정으로 지새운 기나긴 밤이었습니다.
다들 맥이 풀렸는지 의사가 오는지 간호사가 다녀가는지도 모르고 지쳐 병실에서 잠을 잤습니다. 1인실에 아내와 나는 손녀를 보며 거의 일주일을 지냈습니다. 아이들은 원기가 왕성하니 열만 내리면 온 동네를 돌아다닙니다. 퇴원을 해도 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의사가 무슨 검사를 했는데 그 결과가 나오면 퇴원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조마조마하던 둘째가 똑같은 감기 몸살을 했습니다.
약을 먹고 쉬면 좋으련만 출근을 해야한다고 나섭니다. 직원들 월급 계산을 해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이가 아파 바쁘게 오느라 차를 두고 왔으니 내가 운전사가 되었습니다. 출근을 시키고 퇴근 때까지 기다렸지요. 우리나라 일기예보는 이럴 때 정말 정확합니다. 오후 다섯시가 되자 눈발이 날립니다. 동해안에 다소 많은 눈을 예보하더니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집니다. 차츰 눈발이 거세지더니 결국 둘째가 퇴근할 무렵에는 펑펑 내리쏟습니다. 출발도 하기 전에 벌써 십 센티미터는 쌓였습니다. 둘째를 태우고 안동으로 엉금엉금 기어서 나옵니다. 앞은 눈보라가 창문에 윈도부러쉬가 작동되지 않을 정도로 몰아치고 정말 죽어라 핸들만 잡고 버팁니다.
자동차를 운전한다는 것은 핸들과 브레이크가 다지요. 만약 이 둘이 운전자의 의향대로 작동이 되지 않는다면 정말 황당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상황이 내게 닥친 것입니다. 평소 임하댐 둘레를 꼬불꼬불 다니던 지름길이 있습니다. 그 길로 앞에 가던 차들이 모두 꺾어들었습니다. 자연 그 뒤를 따라 갔고요. 그런데 어느 새 앞에 보이던 차들은 어디로 가고 중앙선도 없는 그저 허연 눈밭을 혼자 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한참을 가다가 길을 통제하러 나온 순경을 만났습니다. 이 길을 자주 다녔느냐고 물으며 길이 너무 위험하니 돌아서 가라는 겁니다. 이제 어지간히 왔는데 돌아가라니 내키지 않았습니다. 망설이며 한참 더 가다가 경사진 언덕을 만났는데 차가 제자리에 맴돕니다. 아니 브레이크를 밟아도 뒤로 미끄러집니다. 핸들을 억지로 돌려서 낭떠러지에 떨어지지는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차가 멈추자 내려서 주위를 둘러보니 다행히 뒤에는 비슷한 높이의 밭이었습니다. 모래를 가지고 바퀴 주위에 뿌리고 오던 길을 돌아 다시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아마 둘째가 옆에서 무척 놀랐을 겁니다. 한참을 달려 다시 큰길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안동까지 눈이 쌓인 길과 두 시간 넘게 씨름해야 했습니다. 밤 아홉시가 한참 넘어 병원에 도착했습니다. 집사람은 전화도 하지 않았다고 나무랐지만 살아 돌아온 것만도 다행이었습니다. 이튿날 뉴스에서 안동이 제설작업에 제일 태만했다는 보도가 나왔고 담당자가 문책을 받았습니다. 그 와중에 내가 혼이 났고요.
얼마나 신경을 쏟았는지 저녁을 먹고 퍼지러 잤는데 이튿날부터 몸살이 들었습니다. 거기다가 감기환자와 함께 뒹구니 자연 그 감기도 함께 걸린 것이었습니다. 집사람과 함께 성소병원에서 진료를 받고 함께 입원을 한 것과 같은 생활을 했습니다. 손녀 덕에 모두가 감기를 앓은 것이지요.
세 살짜리 손녀는 이제 몸이 아파 귀찮다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붙잡고 링거 주사를 매단 거치대를 끌어 타고 '한바퀴 돌자!'랍니다. 병실에 있으니 지루한 것입니다.
아프고 나면 더 귀하고 사랑스럽지요. 그래서 아이는 더 어리광을 부리고.
정말 혼난 일주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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