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 액땜 』

일흔너머 2012. 3. 2. 10:40

 

 

나이 육십이 되어 회갑이란 말을 입에 올리면 액운이 달라붙어서 해코지를 당한다고 다들 그럽니다. 그저 조용히, 있는 둥 없는 둥 사는 둥 마는 둥 그렇게 지내라는 겁니다. 실제 재물을 잃는다거나 몸을 상한다거나 심지어 죽는 경우도 보았습니다. 해서 회갑이란 말을 하지 않고 간단히 생일을 차려 먹으려고 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집사람이 아이들에게 이런 내용들을 이해시키고 그저 간단히 저녁이나 먹자고 첫째가 사는 울산 근처에다 콘도 둘을 마련했습니다. 토요일 아침에 아들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요즘 기름 값도 어지간하니 함께 가는 것이 어떤가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아들 녀석은 아이가 보채니 함께 가기가 어려울 거라며 먼저 가라는 겁니다. 하긴 기름 값 걱정할 정도로 경제가 어려운 정도는 아닌 젊은 세대입니다.
 
일부러 집사람과 함께 목욕탕에 가서 피로도 풀고 홀가분한 기분에 천천히 고속도로로 가다가 경주 근방의 건천 휴게소에 들러 점심을 먹었습니다. 다시 출발하려니까 집사람이 커피를 마시자는 겁니다. 뭐 바쁠 것도 없으니 다시 차를 가장자리에 세우고 두 잔을 뽑아 마십니다.

 

휴게소에는 마침 그네처럼 생긴 흔들의자가 있어서 우리는 아예 몸을 의자에 맡기고 한껏 여유를 부렸습니다. 아직 봄은 멀리 있는지 바람은 차가운데 기분은 들떠서 그네에 앉아 한참 시간을 보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이렇게 시간을 보내며 이미 프로그램으로 짜여진 삶, 즉 앞으로 일어날 엄청난 일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던 겁니다.
 
울산을 코앞에 두고 겨드랑이가 간지러워졌습니다. 아마 아까 먹은 우동 때문에 두드러기가 나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밀가루 알레르기가 있거든요. 아니 수입 밀가루에 있는 여러 가지 방부제, 그리고 음식을 조리할 때 들어가는 조미료 등이 주는 알레르기인 겁니다.

 

집사람이 팔을 당겨 옷을 벗겨주었습니다. 그러니 차는 속력이 느려지고 신호등이 노랗게 서라고 바뀌는 순간이었습니다. 속으로는 그냥 가 버릴까하는 맘도 있었지만 정말 느긋하게  '이런 경우는 서야하는 거지...?'하며 브레이크를 밟고 섰습니다. 차가 서고 정지한 걸 느끼는 것도 잠시 시커먼 그림자가 덮쳤습니다. 집사람은 몰랐지만 운전을 하는 나는 거울에 비치는 검은 물체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속으로 '아, 큰 일이구나. 서지말고 그냥 가 버릴 걸.'하며 그 짧은 시간에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는지 모릅니다.

 

일반 승용차와는 아예 상대가 안 되는 8톤 트럭이었습니다. 우리 차는 서있던 곳에서 칠팔 미터 멀리 밀려 거의 차선에서 밖으로 나가 있었습니다. 비상등을 키고 주차브레이크를 밟고는 밖으로 나갔습니다. 다행이 집사람은 멀쩡했습니다. 평소 허리가 좋지 않은 나만 조금 아팠습니다. 우리 차는 뒷부분이 부서져 엉망이 되었습니다.

 

가해차 운전자는 젊은 사람이었는데 얼굴이 노랗게 되어 달려왔습니다. 자기가 잘못했으니 모든 걸 책임지겠다고 차를 교통에 방해가 되지 않는 곳으로 옮기자고 했습니다. 길 가장자리로 옮기고 사고처리를 위해 전화를 했습니다. 보험으로 처리하면 내 전화기에 상대 보험회사의 사고접수가 되었다는 연락이 옵니다. 그러면 모든 처리는 그 보험회사에서 알아서 해 줍니다.
 
뒤따라오는 아이들에게 놀라지 않도록 전화를 하였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들과 사위가 달려왔습니다. 차는 공장으로 견인하라고 하고 모임 장소로 가서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가족이 함께 하룻밤을 지냈습니다.

 

집사람과 나는 잠자리를 옮긴 탓도 있었지만 사고 때문에 온갖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 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자는 듯 누웠다가도 '이만하기 다행이다. 만약 아이들과 함께 탔더라면 뒤에 있는 사람은 다쳤을 것이다.'라고 이야기하면 '응, 그렇지.'하고 또 자는 척 누웠다가 생각이 떠올라 '이렇게 사고가 나려고 휴게소에서 커피를 마시고 그네를 탔던가보다.'라고 하면 '응, 그래.'라고 하면서 온갖 경우를 찾아 헤매는 것이었습니다.

 

밤새 찾아 헤맨 결과 만약 이랬더라면 사고를 만나지 않았을 것인데 하는 경우는 얼마나 많은지 모를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사고를 당하려고 온갖 짓거리를 다하면서 시간을 맞춰 운명적으로 그 순간에 머리를 딱 들이민 결과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이런 걸 그저 웃어넘기고픈 우연이라고 하기는 그렇고 그렇다고 또 숙명이니 어쩌니 하기도 그렇습니다. 사람이 살면서 주변에서 늘 일어나는 그저 그런 일상이라 여기며 자그마한 액땜 하나 했구나하고 잊어버려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어쨌거나 생각할수록 기가 막힙니다.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급한 친구 』  (0) 2012.03.10
『 독(毒)해야 한다 』  (0) 2012.03.06
『 혼났습니다. 』  (0) 2012.02.28
『 카스텔라 』  (0) 2012.01.19
『 냄새를 맡고 찾아간 곳은 』  (0) 2011.1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