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 먹다가 죽었다 』

일흔너머 2012. 4. 4. 14:04

 

 

봄이라지만 아직 바람은 차다.

일년 농사 준비로 바쁜 친구 농장에 들렀다. 마침 과일나무의 가지치기를 하려던 친구는 연락도 없이 찾아온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이래서 어릴 때 함께 한 초등학교 동창이 좋은 것이다.

 

길가에 집 못 짓는다는 말처럼 가지치기를 하는 걸 보며 온갖 참견을 하는 친구를 나무라며 잠깐 쉬는 사이에 술판이 벌어졌다. 공기 좋고 조용한데 친구까지 같이 있으니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거기다가 한잔 술을 마시니 온갖 이야기가 다 나온다. 특히 어릴 때 학교 다니던 이야기, 거기다가 우리를 이렇게 잘 살아가게 가르쳐준 선생님들의 이야기가 많다.

 

실과 시간에 나무 가지치기에서 잉여가지를 배울 때였단다. 뭇 아이들 앞에다 놓고 선생님이 하신 악담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며 이야기를 꺼냈다. 무슨 잘못을 했는지는 기억이 없지만 자기를 가리켜 바로 이런 녀석이 잉여인간이다라고 하더란다. 평생을 살아오면서 선생님의 그 한마디가 항상 잊혀지지 않고 늙은 나무에 박힌 옹이처럼 가슴에 응어리로 남아있다고 했다. 아무리 감정이 상했다고 해도 선생님이 학생을 두고 할 말은 아닌 것 같았다.

 

우리 동창들이 모이면 가장 많이 떠올리는 선생님 한 분 계신다. 거의 전설적인 인물이다. 아마 모르긴 해도 우리 선배도 또 우리 후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다고 그분이 요즘 학원에서처럼 학생들에게 교과목을 잘 가르친 것은 아니다. 아마 요즘 그렇게 가르쳤다면 학생들 엄살에 별난 학부모 등쌀에 학원 선생들의 고자질에 놀란 장학사의 난리에 벌써 쫓겨났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교실 안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것도 선생님의 교육활동으로 선생님의 책임과 권리였다. 한 마디로 선생님은 우리들의 왕이었다. 그래서 입담 좋으신 「이(李)」선생님은 시대를 타고난 우리들의 영웅이었다. 흔히 요즘 회자되는 '맨토'란 말처럼 항상 우리들에게 희망을 심어주었다.

 

특히 그 중에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이야기는 '먹다가 죽었다'는 것이다.
줄거리는 대강 이렇다.
옛날 어느 가난한 농부가 열심히 일하여 부자가 되어 살다가 죽었는데 그 아들이 장례를 치르며 무덤에 세울 비문을 글 잘하는 선비를 찾아가 부탁을 하게 되었는데 선비가 아들을 보고 그 아버지가 어떻게 살았는가를 물었다. 그런데 무슨 벼슬을 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살면서 누구에게 자랑할 그런  큰 일이 없었다. 결국 농사를 지어 잘 먹고 살다가 죽었다는 일생을 이야기를 듣고 선비는 한참을 가만히 있더니 '먹다가 죽었다'는 글을 써 준 것이다.

 

우리의 「이(李)」선생님은 이런 얘기를 마치 그 농부와 한 마을에 살면서 곁에서 본 것처럼 실감나게 이야기하는 것은 물론 거기다가 사람은 절대로 먹고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 살면서 세상에 의미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가르쳐 주었다.


아마 우리가 살아갈 장래는 세상이 지금 같이 사람들이 물질만능주의, 배금주의에 빠져들 것을 미리 내다보고 우리들이 어떤 길을 가야하는지 가르치려고 일부러 이런 이야기를 해준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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